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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배우 박해일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인터뷰] 배우 박해일의 시계는 거꾸로 흐른다
인터뷰를 하러 카페에 들어섰을 때 한 남자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어떤 멜로디인지는 불분명했으나 그 선율은 꽤 감미로웠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을 때 그가 고개를 돌렸다. 박해일이었다.

"기타는 언제 배운 건가요? 전 몇 번이나 배우려다 안 돼서 포기했는데..."

"데뷔작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 리더 역할을 맡았고, 촬영 당시 3곡 정도는 직접 연주해야 했어요. 그때 처음 배웠는데 지금은 잘치진 못하고 코드 몇 개 외우고 있는 정도에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때 박해일은 청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관객들 뇌리에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13년이나 지난 지금, 놀랍게도 그는 그때와 별반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그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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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은 느림의 미학을 아는 배우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의 행보는 남들보다 조금 더뎠다. 또래의 배우들이 1년에 2~3년의 작품을 선보일 때 박해일은 몇 년에 두 세 편을 했으며, 작품 외 부가적인 활동도 하지 않았다.

2014년은 박해일이 배우로서 가장 바쁘게 보낸 해가 아닐까 싶다. 지난 6월 장률 감독과 함께한 '경주'를 시작으로 9월엔 임순례 감독이 연출한 '제보자'를 내놓았고, 최근엔 신작 '나의 독재자'를 개봉시켰다. 1년에 무려 3편. 그동안은 보기 힘들었던 빠른 발걸음이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는  자신을 김일성이라 굳게 믿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박해일은 무명 배우를 아버지로 둔 철없는 아들 '태식' 역을 맡았다.

"이해준 감독님과 처음 만난 건 4년 전이었어요. "언제 한번 작품 해요"란 말을 주고받다가 인제야 인연이 닿은 거죠.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하셨고, 전 기꺼이 하겠다고 했죠. 여기에 아버지 역할에 설경구 선배님이 합류하셨고요"

박해일은 선배 배우 설경구와 부자(父子) 호흡을 맞췄다. 9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두 배우가 스크린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니, 다소 무모해보이기도 했다. 영화가 마법 같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이 말도 안되는 설정이 스크린 안에서는 실제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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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 선배였기에 더 집중이 잘됐죠. 신기하게도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우리 아버지와 닮았단 느낌을 받았어요. 연기에 몰입하다 보니 촬영장 밖에서도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촬영 현장의 좋은 기운이 두 사람의 연기 호흡에도 십분 반영됐다. 박해일은 "좋은 시너지가 났다고 생각해요.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데 있어 어려움이 없었어요. 우리 모두 준비가 돼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현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번 영화를 통해 폭발적인 열연을 펼친 설경구는 파트너 박해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연기라고 말했다. 특히 영화 '은교'를 통해 특수분장의 어려움을 경험한 바 있는 박해일이었기에 선배가 겪는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은교'를 찍을 때는 겨울이라 분장 시간이 길어도 그나마 참을만했는데 설경구 선배는 초여름에 하루 네 시간씩 특수 분장을 받았어요. 낮신을 찍는다 하면 아침부터 출근해 실리콘을 얼굴에 붙여야 했죠. 또 촬영이 끝나고 다른 배우가 집에 갈 때도 남아서 두 시간 정도 해체작업을 해야 했고요. 결고 쉬운 일이 아니에요. 놀라운 건 그렇게 분장을 해도 감정이 실리콘 마스크를 뚫고 나왔단 거죠. 감동받았습니다"

'나의 독재자'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도 나오지만, 뒤늦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 아들도 등장한다. 박해일이 맡은 '태식'이라는 역할은 어쩌면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과 닮아있다.

"태식은 아버지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안고 있어요. 그런 가운데 김일성으로 사는 아버지의 변화를 보면서 원망을 품은 거죠.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이 이해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어요.

성근은 이름없는 배우다. 게다가 노모와 어린 아들을 둔 가장이다. 아들 앞에서 멋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성근은 형편없는 연기력에 긴장까지 잔뜩 해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에게 김일성 대역 제안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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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을 연기하며 스스로 김일성이라 믿어버린 배우의 삶,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캐릭터와 혼연일체 되고 싶은 마음은 배우들의 공통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배우에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죠. 우리 영화는 그것을 아주 세밀하게 보여줘요. 배우가 연기하면서 인생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도 있겠죠. 그렇다면 저 역시 거부하긴 힘들 것 같아요"

박해일은 '그 순간'을 위해 자신만의 연기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매해 인터뷰 때마다 자신의 연기는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며 경지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말해왔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해준 감독에 대한 박해일의 신뢰는 따뜻한 감동이 담긴 영화로 확인됐다. 박해일은 '나의 독재자'가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 표류기' 등으로 이어진 이해준 감독의 독특한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감성의 폭에 있어서는 한층 넓고 깊어진 영화라고 자부했다.  

"쌀쌀한 날씨에 더없이 걸맞는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따뜻한 온기를 품고 극장을 나설 수 있을 거에요"

박해일은 올해 보여준 다작 활동에 대해 "의도한 건 아닌데 지난해 8월 '경주'를 시작으로 '제보자' 그리고 올 여름 '나의 독재자'까지 쉬지 않고 찍었네요"라며 매해 이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운도 따라야 하고 에너지도 충만해야 하니까요. 이번 작품 홍보 활동이 끝나면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갖고 싶네요"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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