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명함 한 장을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까지 많은 연예인을 인터뷰해 왔지만 대뜸 명함부터 달라고 말하는 연예인은 처음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정려원의 손에 기자의 명함을 건넸다. 정려원은 바로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명함을 찍더니, 명함 속 정보를 읽어들이는 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곤 “신기하죠?”라며 어린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신기한 것’을 공유하며 처음 마주한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했다. 인터뷰 도중에는 손에 펜을 잡고 종이 위에 이것저것을 쓰고 그려가며 자신의 설명에 살을 덧붙였다.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인터뷰. 정려원은 상대방을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SBS ‘드라마의 제왕’에서 그가 연기한 이고은 캐릭터처럼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드라마의 제왕’이 끝난지 일주일이 좀 지났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영화 시사회랑 지인 결혼식 같은 곳에 다니고, 언론 인터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보통 드라마가 하나 끝나면 기운이 많이 빠져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근데 이번엔 좀 달라요. ‘드라마의 제왕’은 촬영장 분위기도 정말 좋았고, 촬영 여건이 여유로워서 충분히 쉬면서 촬영했거든요. 그래서 에너지가 넘쳐요.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드라마의 제왕’의 촬영장이 항상 화기애애했다던데, 진짜인가 보군요.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많이 친해졌나요?
“영화와 달리 드라마 촬영장은 배우들이 친해지기 어려워요. 서로가 나오는 대본보기 바쁘고, 촬영 끝나면 바로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해야 해서 친해질 시간이 없어요. 근데 ‘드라마의 제왕’은 좀 여유가 있었어요. 감독님도 빨리 찍으시는 스타일이고, 대본도 여유롭게 나오고, 배우들도 자기 분량은 철저히 준비해오니 촬영이 수월했죠. 그러다보니 배우들끼리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상대역이었던 김명민 씨는 어땠나요? 연기에 관해선 철저한 분이라 친해지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연기엔 엄격한 분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연기에 터치하진 않으세요. 저한테 잘해주셨고, 저도 같이 연기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역대 김명민 선배님과 같이 연기한 여배우들 중에서 제가 제일 친해졌을 거에요.”
-그렇게 자신해도 되는 건가요? 김명민 씨가 아니라고 하면 어떡해요.
“안그래도 제가 선배님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다녀도 괜찮겠냐고. 근데 ‘그래 맞다’라고 인정하시더라고요.(웃음)”
-강현민 역을 연기한 최시원 씨는 어땠나요?
“어리지만 연기경력이 꽤 있어서 준비하는 태도도 임하는 자세도 남달랐어요. 진짜 연구하는 스타일이에요. 극중 강현민이 혀를 굴려서 브래드 피트를 흉내내는 부분들 있잖아요? 시원이는 실제로 브래드 피트가 나온 샤넬 광고를 녹음해서 듣고 있더라고요. 또 사람들의 포인트를 짚어내 자기 것으로 승화시키는 능력도 대단해요. 정만식 선배님의 표정, 숀펜의 표정 등에서 한 포인트를 잡아내 그걸 강현민스럽게 만들더라고요. 시원이 때문에 웃겨서 제가 NG를 많이 냈어요. 에너지가 넘쳐서 남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친구에요.”
-극중 고은이와 정려원 씨,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아 보였어요.
“진짜 저와 고은이는 많이 비슷해요. 성격도, 긍정적인 것도, 이상적인 것도 다 저와 같아요. 고은이의 글쓰는 능력, 그것 하나만 빼면 진짜 저와 비슷해요. 드라마 작가로서 고은이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고은이는 글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데, 그 안에서 기승전결을 구축해 이야기를 쓰고, 앤서니(김명민 분)가 요구하는 대로 막힘없이 대본을 수정할 줄 알죠. 전 그렇게 못하거든요. 고은이가 ‘나 천재인가봐’라고 대놓고 말한 적이 있는데, 타고난 드라마 작가로 캐릭터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 부분을 더 강조해 연기했어요.”
-그런 고은이 캐릭터는 작가들이 요구한 건가요?
“초반엔 고은이 캐릭터를 잡기위해 작가님들께 고은이에 대해 많이 얘기해달라 했어요. 그래서 신마다 작가님들이 바라는 바를 귀기울여 들었죠. 그 후론 작가님들이 절 보고 대본을 썼어요. ‘려원이가 이렇게 행동하니 그걸 넣자’ 하면서요.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저와 잘 맞는 고은이가 탄생한 것 같아요. 서로 도움이 된 거죠.”
-극중 고은이의 노트북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노트북 겉이 그림과 글로 가득했는데, 직접 꾸민 거라면서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소품 하나하나가 그 캐릭터를 보여주잖아요. 고은이의 노트북은 특히 더 드라마 작가인 고은이의 손때가 많이 묻어야하는 물건이라 생각했어요. 처음엔 소품팀 팀장님이 꾸며주셨는데 고은이 코드랑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지우고 제가 다시 꾸몄어요. ‘시나리오 작가가 가져야하는 마음 30가지’ 그런데서 제 마음에 드는 글들을 적고, 그림도 그리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꾸몄는데, 소품팀장님이 제가 한 게 더 캐릭터에 잘 맞는다고, 훨씬 더 고은이스럽다고 하시더라고요.”
-손재주가 정말 좋잖아요. 그린 그림이 갤러리에 전시된 적도 있고. 미술 공부를 따로 한 건가요?
“아니요. 배운 적은 없어요. 그래서 한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긴 해요. 어머니가 미술을 전공하셨는데 그 재능을 물려받아 심미안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옷을 하나 고르더라도, 보푸라기가 잘 일어나는 천인지, 한 번 빨면 망가지는 옷인지, 그런 게 제 눈엔 보여요. 계속 옷이나 천이나 이런 쪽을 파고 연구해서 그런 눈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심미안이 자타공인 ‘패셔니스타 정려원’을 만든 거군요. 패션 쪽 사업은 생각이 없나요?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 흥미를 잃어요.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제가 그린 그림을 본 어떤 일본 분이 정말 마음에 드니 더 크게 그려줄 수 있냐고, 돈은 부르는대로 주겠다고 의뢰를 했어요. 그래서 더 크게 그리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시간도 여유로웠고 그릴 여건도 다 갖춰졌는데, 그 전엔 3시간만에 그렸던 그림이 다시 안 그려졌어요. 저 스스로 미쳐서, 갑자기 그 것에 꽂혀서 해야하는 건데 누군가가 하라고 시키고 데드라인이 정해진 ‘일’이 되니 못 한거죠. 이런 식이면 장사꾼은 절대 될 수 없어요.”
-그럼 그런 쪽 일을 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건 어때요?
“좋죠. 퍼스널 쇼퍼 같은 역할 시켜주면 잘할 자신 있어요. 그런 쪽 시나리오는 아직 받아보지 못했는데, 패션에 관련된 작품에서 연기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드라마의 제왕’이 끝난 지 얼마 안됐지만 에너지가 넘쳐서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지금 바로 뭘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 전에 제가 보고싶거나 하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만나야죠. 그걸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릴 거고요.”
[사진=김현철 기자 khc21@sbs.co.kr]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