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매체가 지적했듯 여야가 그나마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선관위의 중재안 덕분이었다. 말이 중재안이지 여야의 다툼 속에 합의가 미뤄지자 일정에 쫓긴 선관위가 울며 겨자먹기로 내놓은 안이다. 의석수 조정에서 세종시 증설이 문제가 된다면 19대 국회에 한해 국회의원 정수를 현행 299인에서 300인으로 늘리자는 것이다.
여야는 강원도 원주, 경기도 파주, 세종시 등 3석을 늘리기로 한 뒤 이 늘어난 숫자를 어디서 줄이냐를 놓고 줄다리기에 돌입했다. 일단 각자 텃밭인 영·호남에서 1석씩 줄이는 데 까지는 의견을 좁혔다. 마지막 1석을 놓고 '비례를 줄이자', '의석 많은 영남에서 줄여라', '인구에 비해 의석수 많은 건 오히려 호남이다', '수도권에서 줄이자' 등등 온갖 안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하는 식으로 각각 이유를 달아 비토했다.
선관위 손목 비틀어 1석 늘리기
그냥 1석을 늘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지만 도끼 눈을 뜨고 지켜보는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여야 모두 늘리자는 말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계속 딴소리들만 늘어놨다. 결국 재외국민 선거인명부 작성 등 선거일정에 차질을 우려한 선관위가 대신 나섰다. 선관위 내에서도 "아니,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게 뻔한데 왜 우리가 나서서 그런 안을 내냐"는 볼멘 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을 안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면서 결국 중재안 아닌 중재안을 내게 된 것이다.
정치권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지 선관위의 중재안을 냉큼 받지는 않았다. 다만 과거에도 여야가 합의를 못하면 선관위 안으로 타협을 봤다거나, 선관위의 입장을 감안해 최선을 다 하자는 식의 반응들을 내놨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겐 뻔히 속보이는 그런 식의 반응이 더 짜증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선관위 안을 놓고 협상을 연 지난 달 23일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협의는 더욱 그랬다.
합의된 것 없다더니… "지도부에 보고" 뭘?
이날 여야 간사는 협상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아무런 합의도 하지 못했다며 회의실을 나왔다. 그러면서도 지도부에 보고한 뒤 다음 날 다시 회의를 열겠다는 이해 못할 말을 했다. 아니, 합의한 게 없는데 뭘 지도부에 보고하겠다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가 선관위 안대로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으로 늘리는 데 여야가 잠정 합의했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흘 뒤 말 많고 탈 많던 선거구 획정 관련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여기까지는 많은 방송과 신문들이 지적한 대로다. 여야가 시간끌기로 선관위를 몸 달게 해 300명 안을 내게 함으로써 손 안대고 코 풀었다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왜 300명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사실 국회의원 300명이 논란이 된 것은 국민들의 심리적 저항감에 기인한 점이 크다. 마치 가격표에 $2.99라고 적힌 것보다 $3.00라고 적힌 게 심리적 저항감이 큰 것과 같은 이치다. 국회의원 1명 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1명 늘어난 건 20대 국회 때 다시 줄이면 된다. 오히려 우리가 따져봐야할 건 300명 혹은 300명에 가까운 국회의원 숫자가 적정하냐는 것이다.
국회의원 숫자를 줄여야 하는 이유
얼마 전 한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점심을 함께 했다. 총선철을 맞기도 해서 출마할 지역구는 알아보고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의원은 지역구 의원을 해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며 지역구로 나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지역 관리하고 또 지역 민원 챙기고 하다보면 정작 법안 만들고 행정부를 감시하는 입법기관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는 제대로 챙길 시간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시간이 없다보니 그저 당에서 추진하는 법안이나 정책에 거수기 역할이나 하고 또 언론에서 일이 터지면 장관 불러 호통치는 정도가 전부라는 것이다.
지역구민들의 지지로 선출되는만큼 국회의원이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물론 지역 대표성도 있다. 하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회의원의 지위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 속에 그 이유가 잘 담겨 있다.
여기서 핵심은 국회의원은 선거구민의 위임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국회의원은 전체적인 국익의 차원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지 자기 지역구민만을 위해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국익을 위해서라면 지역구민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현실에서 이런 국회의원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왜 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좁은 지역에서 너무 많은 의원을 뽑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5개 동(洞)으로 이뤄진 지역구에서 1개 동이 민원 제기에 나설 경우 설사 그것이 지역이기주의라 하더라도 지역구 의원 입장에선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10개 동(洞)으로 지역구가 넓어진다면 1개 동의 억지 민원은 국익 차원에서 무시할 수 있다. 자기 양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그 만큼 넓어진다는 말이다.
자치단체장과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지역에 관한 영향력만 놓고본다면 자치단체장이 누구보다 앞선다. 따라서 자치단체장은 4년마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국회의원 입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나마 지역구가 여러 자치단체로 구성돼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지역구가 한개 자치단체에 들어가 있다면 그 자치단체장과의 관계가 선거결과를 좌우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장관급이자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행정자치부 아래 그것도 광역자치단체도 아닌 기초단치단체의 관리자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실제로 일부 지역의 경우 1개 기초자치단체가 많게는 3개의 지역구로 나뉘어져 있다. 좀 심하게 말해서 1명의 기초단체장이 3명의 장관급 국회의원을 거느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지역과 무관하게 국정을 보기란 힘들 수밖에 없다. 3선 연임을 마친 지자체장들이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다. 국회의원이 지역정서에 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자 의원 수를 줄여 선거구를 보다 광역화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실무적인 면도 있다. 현재 국회의원들의 가장 큰 요구사항 중 하나가 보좌진 확충이다. 솔직히 현재 보좌관과 비서관, 비서를 합해 9명 정도인 보좌인력으로 정무와 정책, 지역 업무를 모두 돌보기란 쉽지 않다. 국회에 입법조사처 등 지원부서가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원 수를 축소하되 보좌진을 대폭 확충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또 상임위 운영과정에서도 위원 숫자가 너무 많아 충실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위원 수가 30명씩 되는 상임위의 경우 1인당 5분씩만 발언을 해도 한 순번을 도는데만 1시간 30분이 걸린다. 만약 긴급 현안질의라도 열리게 된다면 각자 질의에 보충질의, 의사진행 발언 등등 하다보면 제대로 된 논의가 진행되기 보다 하루 종일 회의를 하고도 각자 자기하고 싶은 말만하고 끝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누군가 나서야
헌법 41조 2항은 국회의원 정수와 관련해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소 200인 이상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몇 명의 국회의원이 우리 나라 현실에 가장 부합하는지는 전문가들이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 숫자를 법률로 정하게 돼 있는 현실, 즉 숫자를 줄이려면 의원들 스스로 제 살 깎기를 해야하는 구조적 한계를 생각할 때 의원 정수 조정이 결코 쉽지않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우려는 이번 공직선거법 개정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여야는 300인으로 의원수를 늘리는 선관위 안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선거구 획정을 둘러싼 정치공방을 막기 위해 선관위가 건의한 전담 민간위원회 설치 의견은 공감한다는 말만 해놓고 개정안에서 쏙 빼버렸다. 선거구 획정이든 의원정수 조정이든 정치권이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이제는 누군가 나서서 해줘야 한다.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