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일 지난 2002년 러시아 극동 지역 방문 이후 9년 만에 다시 러시아를 찾았다. 러시아측 지도부와의 정상회담을 위해서다. 이번 방문은 양국 모두의 절박한 필요에서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이번 방러와 정상회담을 통해 교착 상태에 빠진 6자회담 재개 등을 포함한 외교적 고립 탈피와 에너지ㆍ경제난 극복을 위한 러시아측의 지원을 호소할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와의 유대 강화를 통해 중국에 치우친 대외 관계의 균형을 잡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러시아 측으로선 내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앞두고 동북아 및 한반도 지역의 안정이 긴요한 상황에서 북한 최고 지도자를 만나 북핵 문제 돌파구 마련 등을 위한 북측의 양보를 설득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한반도 사태 논의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키우려는 계산도 깔려 있다.
◇ 북, 러' 지원으로 외교ㆍ경제난 탈피 시도 = 북한은 북핵 6자회담 재개 논의가 여전히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고,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선포한 2012년을 앞두고 경제 활로를 모색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앞서 5월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북한에 대한 중국의 외교적 지원과 양국 간 경제 협력 문제 등을 집중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중국과 함께 북한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우방인 러시아의 도움도 절실하다. 특히 러시아는 북한에 중국 일변도의 외교와 경제 의존에 균형을 잡아줄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과 관련국간 대화를 줄기차게 제안해 왔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아직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유대를 통해 6자회담 등을 포함한 대화 재개를 압박하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또 경제난 극복과 관련, 중국이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나선지구 개발에 러시아 측의 보다 적극적인 투자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나진항 3호 부두 장기이용권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는 2008년부터 나진항으로 들어오는 동북아 지역의 화물을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운송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운송하기 위한 나진-하산 간 52km 철로 보수 공사를 진행 중이다. 철로 개보수 공사가 끝나는 대로 나진항에 컨테이너 터미널도 건설할 계획이다.
북한은 이미 러시아가 지원키로 한 5만t의 곡물 외에 식량난 극복을 명분으로 추가로 인도적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다. 열악한 전력난 극복을 위한 에너지 지원을 부탁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여기에 김정은 후계 체제에 대한 러시아 측의 승인과 지원 확보도 김 위원장의 주요 방러 목적으로 꼽힌다. 러시아가 3대에 걸친 권력 세습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은 체제 공고화를 위한 러시아 지도부 설득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과제다.
◇ 러', 한반도 안정화 위한 북한 양보 설득할 듯 = 러시아 측에서도 북한과의 대화가 긴요한 시점이다. 경제 현대화의 견인차 구실을 할 극동ㆍ시베리아 지역 개발에 주력하며, 내년 APEC 정상회담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러시아는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외교ㆍ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두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내년 9월로 예정된 APEC 정상회의를 극동ㆍ시베리아 지역 개발을 위한 외국 투자 유치 홍보전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런 러시아에 동북아 지역 안보의 핵심인 한반도 상황의 안정화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러시아는 김 위원장과의 회담을 통해 한반도 안정을 위해 남한과의 무력 충돌을 최대한 자제하고 대화로써 문제를 해결하라는 주문을 할 것으로 보인다. 남한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강조하고 있는 북한의 진정성을 과시하기 위해 북측이 먼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중단과 국제사회 사찰 수용 등의 가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또 미국과 중국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키우려는 계산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의 관계 진전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전략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남북한 사이에서 적극적 중재 노력을 보이며 이같은 움직임을 선보인 바 있다.
러시아는 또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그동안 남북 양측에 줄기차게 제안해온 남ㆍ북ㆍ러 3각 경제 협력 방안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논의돼온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 종단철도(TKR) 연결 사업, 러시아 극동 지역의 잉여 전력을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수출하는 사업, 극동ㆍ시베리아 지역 생산 가스를 북한을 경유하는 가스관을 통해 남한에 공급하는 사업 등이 그것이다.
최근 들어 북한은 이같은 사업들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번 러-북 회담에서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를 양국이 대외적으로 공포할 가능성이 높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지난 15일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낸 광복절 축하 전문에서 "가스화와 에너지ㆍ철도 건설 분야 호상 관심사에 대한 협조를 확대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북한 경유 가스관 부설 사업은 최근 러시아와 남북한 당국이 집중적 접촉과 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 얘기를 진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어 예상 밖의 합의가 나올 수 있다.
◇ 최근 잇단 러-북 접촉 뒤이은 행보 = 김 위원장의 방러가 지난해 말부터 러-북 정부 차원의 교류와 접촉이 유례없이 긴밀해진 가운데 성사된 점도 주목된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박의춘 외무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핵 농축 프로그램 공개로 인한 한반도 위기 상황과 관련한 해법을 논의했다. 올 2월엔 리용남 무역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2007년 이후 중단된 러-북 정부 간 경제협력위원회를 재키키로 합의했다.
3월엔 알렉세이 보로다브킨 러시아 외무차관이 평양을 찾아 북측과 경제협력위를 올 여름에 개최키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양국 경협위는 이달 25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다.
뒤이어 5월 중순엔 미하일 프라드코프 대외정보국(SVR) 국장이 북한을 찾았다. 프라드코프 국장은 이례적으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북한에 곡물 5만t을 지원키로 약속하고 양국 경제협력, 북핵 문제 등을 논의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9일 "러시아 정부가 식량(밀가루) 5만t을 무상지원키로 한 데 따라 식량을 실은 첫 배가 흥남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또 6월 28일에는 김영재 주러 북한 대사가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국영가스회사 '가스프롬' 본사를 방문해 에너지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그 바로 뒤인 7월 4일 알렉산드르 아나넨코프 부사장이 이끄는 가스프롬 대표단이 사흘간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해 강석주 내각 부총리를 만나고, 김희영 원유공업상과 실무회담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나넨코프 부사장의 방북도 가스관 부설과 관련한 구체적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러시아 현지 언론은 분석했다.
그리고 7월 22일에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 장관회담의 틀 내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박의춘 북한 외무상이 만나 6자회담 재개 방안 등을 논의했다.
김 위원장의 방러와 북-러 정상회담은 그동안 실무차원에서 밀도 있게 논의돼온 협력 사안들의 성과를 최종 확인하고 이를 대내외에 공표하기 위한 행보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북-러 정상 어떤 논의할까
북, 외교 고립·경제난 극복 위한 러' 지원 호소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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