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뉴스>
<앵커>
고 황장엽 씨는 북한을 떠나온 이유에 대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다 합쳐도 7천 만의 생사운명과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탈북 당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북에 남겨진 가족들은 모두 숙청당했고 자신 역시,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보도에 이한석 기자입니다.
<기자>
아내와 손자들을 안고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황장엽 씨.
황 씨와 북녘의 가족들의 마지막 사진입니다.
황 씨는 가족들에게 '오늘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달라'는 편지를 남긴 뒤 97년 망명했습니다.
[황장엽 (1997년 4월 망명 기자회견) :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다 합쳐도 7천 만 우리 민족의 생사운명과 바꿀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황 씨의 망명 이후 북의 가족들은 물론 측근들은 모두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상학/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 아드님이 정치범 수형소에 끌려가시다가 차에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고 그런 얘기를 다 들었었거든요. 너무 아픔이 크니까…]
황 씨는 지난 한국 망명 이듬해인 1998년 대북 선교 활동을 해오던 김숙향 씨를 수양딸로 맞아 북녘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김숙향/고 황장엽 전 비서 수양딸 : 아버지이기 전에 동지적인 입장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황장엽 씨는 지난 2001년 목숨을 걸고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평생의 동지 김덕홍 씨와 대북 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결별하면서 더욱 고독한 처지가 됐습니다.
황장엽 씨는 북한의 끊임없는 신변 위협 때문에 극히 제한적인 사람들과 교류하며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안가에서 인생 말년을 쓸쓸히 보내야 했습니다.
(영상취재 : 설민환, 영상편집 : 김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