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아사히 신문을 뒤척거리다가 재미있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최근 일본이 미국, 중국에 이어 'GDP 3위'로 떨어진 것에 대한 앙케트 기사였는데, 절반에 가까운 47%의 일본인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1위가 '일본이 이대로 질질 끌려가며 후퇴할 것 같아 불안해서'였고, 2위는 '일본의 시대가 갔음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또 4위는 '중국에 진 것이 분해서'였고, 5위는 '오랫동안 유지했던 지위를 잃은 것이 슬퍼서'였습니다.
기사 내용대로라면 절반 가까운 일본인이 'GDP 3위로 전락한 현실'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분하거나,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앙케트 결과도 결과지만, 이에 대한 신문의 원인 분석과 전문가가 제시한 대처법이었습니다.
신문은 이번 결과는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간판을 내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반영했다"고 진단하고, 왜 그런지 또 어떻게 하면 '일본인의 상실감'을 치료할 수 있을지 ‘처방’을 제시했습니다.
신문은 일본인이 실망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로 '성공신화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GNP의 뜻도 모르면서 "일본은 GNP가 미국에 이어 2위니까,세계 제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교육을 받아왔던 탓에, GDP가 3위로 떨어지자 마치 자신의 지위도 그만큼 낮아진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년층으로 갈수록 이번 결과에 대해 비관적인데, 이는 고도 성장기를 경험하면서 그만큼 프라이드도 컸던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10년도 안 돼 소득이 2배로 뛰고 한때 미국을 추월할 뻔 했던 '영광의 시대'를 살았던 일본인들에게, 한수 아래로 여기던 중국에게 추월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격세지감'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처참한' 밴쿠버 올림픽 성적도 쇼크를 배가시켰다는 분석입니다.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동계스포츠의 맹주를 자처했던 일본이 자신했었는데 한국(5위)과 중국(7위)에 뒤진 채 '노메달'의 수모를 당한데 이어 GDP순위까지 밀리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스포츠에 이어 경제까지...'라며 불안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계 올림픽에 참여한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서는 '비장감'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일본 선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거나 "올림픽을 보니, 이제는 한국과 중국을 겸허하게 배워야겠다는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라는 의견을 제시한 응답자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문은 이렇게 스포츠 결과에 연연하는 것도 '국민이 일치단결해 세계 2위를 달성하자'라는 식의 구호가 난무하던 과거 집단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단언하더군요.
그러나 사실 신문이 주목한 것은 47%의 일본인보다 'GDP 따위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답한 53%의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사회에서 성장 중심주의의 사고방식이 붕괴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한 일본인들이 "GDP가 생활수준과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답해, "GDP는 곧 행복지수"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응답자들은 "과거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이 유지되던 일본사회라면 GDP는 국민생활의 풍요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아니어서 GDP에 관심이 없어졌다"거나 "과거와 달리 지금의 GDP는 기업의 성과에 불과하다. 고용안정이 붕괴된 지금, 실제 국민생활과는 별 상관없는 것 같다"라며 GDP에 연연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된 걸까? 신문은 '잃어버린 10년'이 가져다 준 '겸손함'과, 다른 나라의 사례가 일본인의 GDP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했다고 분석합니다.
"스페인에 가보니 적은 월급으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든가, "경제가 붕괴된 시절의 영국에서 살아봤지만, 사회간접자본이 잘 갖춰져서 그런지 풍요롭게 잘 살더라"라는 식으로 답한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풍요로웠던 '쇼와시대'의 성장일변도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든가, "GDP 따위의 개념은 중국에게 아예 줘버리고, 생각을 전환해야 할 시기"라며 적극적으로 이번 기회에 GDP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한다는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문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전문가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맺더군요.
"일본처럼 매 분기마다 경제성장률을 발표하고, 그 수치에 일희일비하는 나라는 드물다. GNP와 GDP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수치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국민의 생활수준과 직접 적인 관련이 있는 수치는 실업률과 같은 고용관련 통계다. 극단적으로 말해 고용이 안정돼있으면 성장률이 0이어도 국민생활과는 큰 상관없다. 이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고 말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일본에 살고 있는 친구의 아내가 겪었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새로 사귄 일본 학부형이 "정말 한국 가정에도 PDP나 LCD 대형 TV가 있느냐"며 진지하게 질문을 해, 속으로 어이없어하며 "한국에는 TV와 냉장고도 크고, 일반적으로 집 평수도 일본보다 넓다"라고 대답했더니 도저히 못 믿어하는 눈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학부형은 "GNP가 높은 일본이 이 정도 생활수준인데, 그보다 낮은 한국은 훨씬 못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것이죠.
얼마나 일본인들이 GNP나 GDP로 다른 나라 국민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써왔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GNP와 GDP 수치에 일희일비하고, 그것이 마치 그 나라 혹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을 반영하는 절대적인 척도인 듯이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죠.
사실 GNP와 행복지수는 거꾸로 가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습니다.
저 역시 그런 편견을 키우는 기사를 적지 않게 써오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는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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