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기간 동안 우리 사법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의문은 처음엔 순전히 기사 압박 때문에 가진 것이었습니다.
또 60년이나 지났는데 당시 사진 단 한 장이라도 남아 있을까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예상 밖으로 입수하게 된 6.25 당시 사법부의 흔적들은 남아 있는 양은 적었지만 유심히 관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남아 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법원과 서울소재 법원은 이틀뒤인 6월 27일에 피난을 갔습니다. 석달 뒤 서울이 수복되면서 다시 돌아왔지만, 1951년 1월 4일, 이른바 1.4 후퇴때 대법원과 서울소재 법원들은 재차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판사들은 개인마다 알음알음 부산으로 찾아갔고, 재판 기록은 기차와 트럭에 실어 이동했다고 합니다. 대법원이 서울로 다시 환도한 시점이 1953년 8월이니까, 2년 7개월동안 부산 생활을 한 셈이군요.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 및 부산지방법원이 부산지방법원 건물에 한꺼번에 모여 살았는데, 법정 한 곳을 비워 반으로 나눈 뒤 한 쪽 공간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집무실로,다른 쪽 공간은 대법관들이 벽을 바라보며 앉아 집무를 보는 공간으로 썼다고 하네요.
부산 피난시기에도 재판은 꾸준히 진행됐는데, 서울고등법원의 경우(물론 위치는 부산) 형사 사건 재판은 한달에 두 번 정도 대전으로 출장을 가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형사 사건 피고인들이 대전에 모두 모여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당시 부장판사 한 분이 나중에 6.25 전쟁때를 회고하며 남긴 육성 증언엔, 당시 피고인의 90%가 나무를 벌목해 움막을 지은 산림법 위반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전쟁 때문에 집이 없어 벌어진 너무 안쓰러운 일인데, 대부분 석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전쟁 피난길에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된 판사들이 많았나봅니다. 1951년 2월 9일 한상범 대법관과 판사 41명 등 모두 42명을 일괄 퇴직시켰습니다.
대법원 기록에 따르면, 1954년까지 법관은 피살자 8명, 피랍자 35명, 법원 직원은 피살자 2명, 피랍자 35명,행방불명 5인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인 틈을 타 1952년엔 광주고등법원을 신설했습니다. 또 같은해에는 판사와 검사 특별임용시험을 실시해 새로운 법조인들을 발탁했는데요. 유현석 판사의 합격증명서가 아직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6.25 전쟁의 참상속에 우리 사법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조각조각만 남아 있지만, 당시의 고달픈 현실이 그대로 묻어 나는 소중한 역사의 흔적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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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법조팀의 현장 반장으로 맹활약 중인 정성엽 기자는 2002년에 SBS로 둥지를 옮겨 사회부 검찰 출입기자와 정치부, 뉴스추적팀 등에서 취재력을 과시해왔습니다. '제대로 정확히 보고 쓴다'는 좌우명을 가진 정기자는 최근에는 삼성그룹 후계자인 이재용씨의 이혼소송 사실을 발빠르게 취재, 특종보도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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