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을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이건희 전 삼성회장, 2008년 4월 22일
이 전 회장의 퇴진 선언 1년이 지났습니다.
실제 삼성의 외형은 소위 '혁명적'이라 할 만큼 바뀌었습니다.
이학수, 김인주 퇴진과 함께 그들의 상징이자 그룹의 핵심 파워였던 전략기획실이 전격 해체됐습니다.
대신 그룹 경영은 계열사 사장단협의회가 맡기로 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계열사 사장들이 서초동 삼성 본관에 모여 회의를 하고 유명 인사를 모셔놓고 경제관련 현안에 대해 '강의'를 듣습니다.
인적 쇄신도 단행했습니다.
계열사 사장 가운데 절반 이상인 25명이 옷을 벗었습니다.
과거 핵심 자리에 있던 임원들도 많이 나갔습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경제난 속에 삼성전자가 지난 4분기 9천억원이 넘는 적자가 나고, 계열사들의 뚜렷한 성장세가 보이지 않으면서 '삼성 위기론'이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공공연하게 떠오르는게 현실입니다.
1분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올해 투자규모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기업들은 일찌감치 투자규모 발표와 함께 '위기를 기회'라고 외치며 신규사업 진출과 대규모 R&D 계획을 밝히고 나서고 있습니다.
또 다른 대기업들이 5년 뒤, 10년 뒤 새로운 성장동력을 지정해 장기적인 사업 개발에 적극 나선 반면, 삼성은 아직도 전자의 LED TV 이후 뚜렷한 신 성장동력 사업구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먹고 살만한 먹을거리 발굴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일까?
일각에선 이게 바로 '주인'이 있는 조직과 '주인이 없는' 조직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책임감을 가진 주인은 자기 책임아래 팍팍 판단해서 밀어부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없는 조직(일부 공기업을 생각하면 쉽습니다)에선 경영자가 '보신'을 위주로 모험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이 상태에서 별 과오없이 잘 지내면 욕 안먹고 다음에 또다시 경영할 수 있는 기회도 노려볼 수 있고...구태여 임기 뒤까지 생각하면서 '사고'를 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일부에선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 일선 복귀의 필요성을 점치는 얘기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요? 알면서 그냥 무조건 '퇴진'을 했다면 정말 나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날 찾아올 거다' 이런 믿음까지 가지진 않았겠죠.
삼성은 일반 사기업이지만 국가경제 면에선 그 '공공성'을 결코 무시하면 안되니까요.
물론 처음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사장단 회의란 집단지도체제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단회의에서조차 이수빈 회장이 이건희 전 회장이나 이학수 실장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준다는 얘긴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이수빈 회장과 김징완 부회장, 이윤우 부회장 등 원로들이 회의를 주재하긴 하지만 특별히 계열사에게 '지시'나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는 겁니다.
사장단 회의에서 무언가 특별한 결정이 내려졌단 소식도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삼성은 쇄신을 발표하면서 계열사별 '독립경영'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인사권 행사만 봐도 독립경영은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큰 결정사항이나 판단사항은 독립경영 주체인 계열사 사장이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22일) 아침에 삼성 고위 임원에게 물었습니다.
"1년이나 됐는데 이런 이런 비판과 지도력 부재 얘기가 나온다는 건 '사장단 회의'가 무용지물이거나 제 역할을 못한다는 반증인가요?"
그 임원은 한참 생각하더니 "아직 1년 밖에 안 됐습니다."라고 답하더군요.
물론 삼성이 복지부동하는 건 아닙니다. 나름대로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있는 사업 잘 키워서 세계 1위도 하고, 창의성 있는 조직 문화 만들겠다고 직원들 자율복장제나 자율 시간근무제도 도입하고...현장 경영한다고 다 현장으로 배치하고, 사옥도 서초동으로 옮겼고.
하지만 지금은 우울합니다.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결정을 못하고 있다….
삼성측은 이에 대해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고 계속 쇄신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1년 뒤인 지금 무언가 확실한 '변화' 를 결과물로 내라면 무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확실한 건...정치가는 정치 잘해서 판단받고, 기자는 기사 잘 써서 판단받듯이, 기업은 돈 잘 벌어서 판단받으면 된다는 겁니다.
삼성에 대한 국민 기대는 분명 큽니다.
정당하게 돈 잘버는 기업, 그리고 그 돈을 정당하게 잘 쓰는 기업으로서의 삼성이 다시금 인식될 수 있을 때, 국민들은 삼성이 진정한 '쇄신'을 했구나...하고 믿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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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경제부 산업팀에서 활약 중인 홍순준 기자는 삼성.LG등 전자업계와 공정위, 소비자원을 출입하고 있는 고참 기자입니다. 1995년 입사 후에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잔뼈가 굵었고 사건팀의 리더인 '시경 캡'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특유의 돌파력과 폭넓은 취재로 보내오는 기업 내면의 깊은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