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 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31빌딩, 이런 걸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사진이 부의 상징으로 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1991년 처음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어렸을 적 부러움의 상징이었던 맨해튼 거리는 그저 빌딩숲이었을 뿐 별 다른 감흥은 없었습니다.
그때 방문했던 abc 방송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건물 규모도 아니고 방송 시설도 아니었습니다. 뉴스 진행자인 피터 제닝스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돌아앉았을 뿐인데, 화면에 비친 배경은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 순간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간단하게 되는 일을 우리는 왜 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당시 피터가 앉아있던 스튜디오는 당시 한국의 뉴스 스튜디오보다 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튜디오를 사무실 전체 모습이 배경에 나타나도록 배치해서, 앵커가 자리를 틀면 배경이 달라지게 만든 것이죠.
네모난 건물에 한쪽 구석을 스튜디오로 이용하고, 카메라의 방량을 구석에서 가운데 쪽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1층과 2층 사이 난간에 서너 가지 배경 사진 또는 도안을 붙이면 앵커가 돌아앉을 때마다 다른 배경이 나타나는 것이죠.
결국 하드웨어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고, 주어진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창조적 사고, 소프트웨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당시는 퍼스널 컴퓨터(PC)가 일반화돼가던 시점이었습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구분이 소개되던 무렵으로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며, 앞으로 소프트웨어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프트웨어를 지배하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국내에서는 과거 PC 도입 초기 소프트웨어라곤 외국 소프트웨어에 우리말을 넣은 수준의 초보적인 제품뿐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직접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했었습니다.

그 때 '아래아 한글'이 나오면서 국산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아래아 한글'2.0판이 출시되던 무렵 발표회장에 갔던 일이 있습니다. 단지 워드프로세서 한 제품의 발표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국산 소프트웨어의 자존심이었던 '아래아 한글'이 올해로 탄생 20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와 같은 영화는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 소프트웨어시장에서 몇몇 국산 소프트웨어가 우세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크게 성장한 회사는 별로 없습니다. 사용자 수는 적지 않지만 돈을 내고 사서 사용하는 사용자는 얼마 되지 않고 불법복제가 만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드물다고 하지만, 90년대 PC를 사면 으레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주곤 했습니다. 당연히 불법이지요.
요즘엔 인터넷을 통해 복제 소프트웨어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PC용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도 불법복제품이 만연해서, 정품 보다 복제품이 더 많을 정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서 그 자리에 올라선 반면에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을 보기 힘들고, 결국 유능한 개발자들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포기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지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외국과는 달리 포털 사이트는 국내사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기업이 해외 소프트웨어시장을 개척한 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21세기 초반 한국이 IT강국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고속 인터넷망보급에서 가장 앞서갔고, 신제품을 개발하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시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인터넷 보급은 이렇게 빨랐지만, 정작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내용물은 어떨까요?
얼마 전 일본 야구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매우 놀랐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의 카네모토 선수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인물을 소개하는 한 사이트를 보다보니 바로 어제 있었던 경기의 기록까지 반영돼 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국내 자료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운동경기에 관한 자료 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 관한 자료를 찾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만, 아마도 그런 수준과 양의 자료를 찾으려면 이곳저곳 손품깨나 팔아야 했을 겁니다.
이 글을 쓰려던 중 한 일본 기업인의 한국 경제에 대한 충고를 보도한 기사를 봤습니다.
한일 경제인 협회 부회장이기도한 우에다 가츠히로 일본 오오가키정공 회장은 "일본은 제조업 역사가 깊고 다양한 제조 노하우를 가진 반면, 한국은 표준화된 제품을 제외한 소재, 부품 분야가 아직도 많이 미약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한국 기업이 만든 부품은 불량률이 여전히 높고, 원가, 재료, 기계, 기본적인 기술력 모두가 문제"라고도 했습니다.
우에다 회장의 말은 결국 한국 경제는 외형적 성장은 했는지 모르지만, 기반은 취약하고 내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뉴욕의 마천루에 이어 실리콘 밸 리가 부의 상징을 이어받았고, 다시 월스트리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자리는 누구의 차지가 될까요?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느 길일까요?
![]() |
[편집자주] 깊이있는 분석과 통찰력이 느껴지는 이은종 기자는 그동안 사회.국제 이슈와 경제 현장에서 오랫동안 현장취재와 데스크를 거치고 현재 SBS 보도국 특임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경험과 연륜에서 뿜어나오는 해박한 지식과 함께 일본의 정치.경제에 대한 식견으로 핵심을 짚어주는 글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