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빛깔은 빨간빛과 초록빛 그리고 파란빛이다. 붉은빛 태양과 푸른빛의 초목 그리고 파란 빛깔의 하늘과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자연이라는 공간을 연출한다. 화사한 아침 햇살에 푸른 초록은 반짝이고, 선명한 햇빛에 한 낮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다. 그리고 저녁 무렵, 석양의 노을이 대지에 드리우면 세상은 붉게 타오른다. 자연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형형색색, 빛의 향연을 펼치는 빛의 변주곡이다.
그러나 도시의 빛깔은 회색과 검정색이다. 검은빛 아스팔트를 따라서 회색빛 콘크리트 아파트와 빌딩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 그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이다. 회색빛과 검은빛의 도시는 햇볕을 받아 아른거리거나, 태양빛을 반사하면서 제 빛깔을 감추곤 한다. 그것이 도시의 빛깔이다.
대학로도 예외는 아니다. 개발의 손길에 아래 회색과 검은빛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또 다른 도시의 공간이다. 하지만 애초 대학로는 붉은 색에서 시작됐다. 회색과 검은색이 아닌 붉은 색으로 처음 채색됐다. 붉은 벽돌의 마술사인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서....
김수근은 서울대 건축과를 거쳐 일본 도쿄대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 타워호텔, 자유센터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김중업과 함께 한국현대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예술을 사랑했던 그는 1966년 국내 최초로 종합예술지인 '공간'을 창간했다. 또 그의 건물 1층에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을 마련하고서, 이곳에서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던 김덕수 사물놀이 그리고 병신춤의 공옥진, 살풀이 춤의 이애주씨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198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한국에서 가장 경탄할만한 건축가이자 한국의 로렌초 메디치'라고 평가했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 서울법원종합청사, 경향신문사옥, 국립진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등의 건물이 그의 작품이다.
그런 건축가 김수근은 서울대가 떠난 공간이 주택단지로 개발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소호같은 문화예술의 공간을 조성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문예진흥원이 서울대 본관 건물에 들어오고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될 즈음 그는 미술관 건립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주택공사가 동숭동 땅을 분양할 때 사두었던 한필지의 땅을 기증하고 대신 미술관 설계를 맡기로 자청한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문예회관 건립도 제안하고 역시 건물의 설계를 맡는다.
물론 당시 김수근씨 뿐 아니라 여러 문화 예술인들이 서울시에 개발 반대 의견을 개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도시계획가인 곽영훈씨 또한 자신이 당시 서울시에 대학로를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 했고 또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지금의 대학로가 있게 됐다고 술회한다.
"마로니에 공원은 우리나라 대표적 지성의 산실인 서울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주택과 아파트를 짓겠다는 것은 역사와 지성을 동시에 매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의 제안으로 당시 문화예술진흥원 최창봉 사무총장이 서울 시장에 건의, 이미 팔았던 땅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월간 '오늘의 한국' 2006년 신년호 인터뷰 중에서>
김수근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제안한 문화공간 조성이라는 의견은 다행히도 받아들어졌다. 당시 문예진흥원은 2필지의 땅을 더 사들여 문화 공간 조성에 착수한다. 마로니에를 중심으로 한 미술관과 공연장 조성을 제안했던 김수근씨의 의해 지금의 아르코 미술관, 아르코 예술 극장이 설계된다. 그리고 먼저 1979년 붉은 벽돌로 지은 아르코 미술관이 마로니에 공원 위쪽에 자리 잡고, 2년 뒤인 1981년에는 마로니에 공원 좌측에 또 하나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은 문예회관 공연장이 들어선다. 또 앞서 미술관이 건립되던 그 해에 김수근의 붉은 벽돌 건물이 지금의 대학로 입구에 들어서는데, 바로 건물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인상적인 샘터 사옥 건물이다.
건축가 김수근은 오늘날 명실상부 대학로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에 의해 대학로의 중심인 마로니에 공원 주변으로 전시와 공연시설이 들어섰다. 특히 문예회관은 당시 연극의 주 활동 무대였던 명동에서 연극인들이 훗날 대학로는 옮겨오는 단초가 된다. 그리고 샘터사옥 건물을 포함해 마로니에 공원을 에둘러 붉은 벽돌로 통일된 특징을 갖는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대학로라는 공간에 건축적 미학까지 더 해 주었다.
1986년 건축가 김수근은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한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1931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시골 소년은 훗날 회색과 검은빛의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붉은 색 벽돌로 조성한 문화 공간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가 지은 문예회관에 연극인들이 공연을 올리는 것을 보고, 1984년에는 그가 설계한 샘터사옥 건물에 대학로 최초의 민간 극장이 '샘터파랑새 극장'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그리고 1985년 동숭동이 '대학로'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명명되는 것을 보고, 그 대학로가 문화예술지구로 지정되는 것을 본다. 그것이 그가 본 대학로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던 김수근은 생전에 벽돌 예찬론을 펼쳤다고 한다.
"아무리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한다. 때문에 한 장 한 장 단정히 쌓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벽돌이 지난 조소성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 한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김수근은 인간적인 건축을 지향했던 건축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건축 개념 중 하나가 '둘러싸여 있으나 결코 막히지 않은 공간'으로 지칭한 그이 독특한 공간 구성방법에 있다고 한다. 어떤 건축가는 그의 그런 독특한 구성이 전통 한옥의 대청마루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샘터사옥 건물이나, 아르코 예술극장이나, 아르코 미술관이나 공통적으로 1층 공간이 막히지 않은 채 여기저기로 뚫려 있는 것일까?
김수근의 붉은 벽돌 건축물은 또 아침이나 저녁 무렵이 붉은 태양빛이 드리울 때가 가장 감상하기 좋다들 말한다. 빛에 따라 변하는 붉은 벽돌 건축물, 그래서 그는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말했던 것일까?
"어디까지나 김수근 건축의 요점은 '공간'에 있고 이 공간의 성격도 김수근 선생님이 사용하신 '멋'의 의미를 가진 공간, 즉 '멋의 공간'이 바로 김수근 건축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멋의 공간'을 다시 정리하면 첫째, 시퀀스가 있는 드라마를 가져야 합니다. 이 드라마는 강약의 조절과 부와 부의 구분 뿐 아니라 주제를 가져야 하며 전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되 반복적으로 음미할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그 드라마틱한 공간은 그 전개 형식이 막힘이 없어야 하며 무한시간으로 연결되는 무한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즉 ultimate space in time, ultimate time in space를 가리킵니다. 셋째, 그 공간의 크기는 절대적으로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있고 시선이 편안히 머물 수 있으며 어디에 걸터앉아도 여유 있을 수 있는 크기이어야 하며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며 접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넷째, 그 공간을 구성하고 한정짓는 벽의 표정은 따뜻하고, 풍부해야 하며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집기, 소도구들은 조선의 선비가 사용하던 그런 안목으로 선택된 단아하고 품격 있는 것들이 놓여 있어야 합니다. 이 공간은 반기능일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하면 엄청난 생산의 기능성을 내포한 실질적으로 창조적인 공간입니다. 이러한 공간의 추구가 김수근 건축의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故 김수근 추모 20주기 세미나 중에서..제자 건축가 승효상씨가 본 김수근의 건축 세계>
-김수근-
1931년 2월20일 함경북도 청진 신압동에서 김용환과 김우수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청진의 천마소학교에서 입학했으나 한 학기만 다니고 서울의 교동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그 후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고, 그가 2학년이 되는 해에 그는 건축을 전공한 미군 병사에게서 영어회화를 배운다. 미군 병사의 소개로 처음으로 건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장차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0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하면서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김중업을 처음으로 소개받는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휴교령이 내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 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1954년 동경예술대학 건축과에 입학하면서 요시무라 준조를 스승으로 만나게 된다. 그는 1958년 동경예술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1960년 동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귀국하여 남산에 건립하려던 한국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안 현상모집에 일등으로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의 발발로 설계안은 백지화되었다. 1961년 김수근 건축연구소(현 공간그룹의 전신)를 창설했다. 1966년 건축, 예술종합지인 월간 '공간'을 발행하였다. 1971년 자신의 설계사무소인 '공간 사옥'을 건립하였고, 소극장인 '공간 사랑'을 전위극, 무용, 전통, 연희 등 각종 문화 활동의 장소로 개방하였다. 1986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간암으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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