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모든 시인이 그러하겠지만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밝고 환한 것만 볼 때, 그는 그 밝고 환함과 '동시에' 존재하는 그늘과 눈물을 시로 전해준다. 빛과 어둠은 언제나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빛이라면 비로소 그 사물이 3차원의 입체로서 온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그늘과 어둠이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근처에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있다. 평일에는 거의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주말이면 데이트하는 연일들이들 종종 간이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혹 초상화가 그려지는 모습을 한참 보며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곤 한다. 나는 초상화가 완성돼 가는 과정이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기승전결의 극적인 구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로니에 공원 초상화가 데생 장면
출연: 거리의 초상화가, 20대 여성, 남자친구, 구경꾼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지미짚 카메라가 서서히 다가간다.]
한 여성이 등산용 간이 의자에 앉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조용히 앉아 있다.
모자를 눌러 쓴 화가는 규칙적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거린다.
연필을 쥔 화가의 오른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화가의 도화지위에 집중된다.
여성 모델의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와 시선을 나누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뒤늦게 구경꾼 틈바구니 낀 그 누구라도 쉽게 여성 모델의 남자 친구가 누군지 알 수 있다.
검은 흑심이 쏟아내는 한 줄의 선은 하얀 도화지 위를 거침없이 뻗어 나간다.
검은 선들이 어느새 한 사람의 윤곽을 만들어 간다.
무의미했던 선들이 열십자와 원의 단계를 거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여전히 하얀 도화지 위에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있을 뿐이다.
여성 모델 자꾸 남자 친구를 본다.
그녀의 얼굴에 이제는 어색함을 넘어 지루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구경꾼 무리중 잘 보이지 않는 바깥쪽에 있는 몇 몇 사람들의 이탈이 시작된다.
바로 그 때, 턱수염 더부룩한 관록의 초상화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모자를 매만진다.
그리고, 가볍게 연필을 들어 초상화에 나풀거리는 여인의 머리를 그려 넣는다.
아~ 구경꾼들 사이에서 감탄의 탄성이 새어 나온다.
구경꾼들이 드디어 화가의 그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챈 화가.
그의 손길이 이제 거침없이 사람 같지 않았던 사람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여인의 눈망울이 그려지고, 콧날이 세워지고, 입술이 도톰해 지고 입가는 가냘 퍼진다.
오랜 세월 쌓아온 화가의 내공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구경꾼들의 반응이 눈에 들어왔을까?
간의 의자에 지루하게 앉아있던 여성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남자 친구의 시선과 대화하던 눈빛에, 방금 전까지의 지루함은 온 데 간 데 없다.
그녀의 눈빛은 오직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예쁘게 그려지는 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하얀 도화지 위의 그려진 여인의 얼굴은 점점 구체적 윤곽을 찾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평면 위에 그려진 평면일 뿐이다.
화가가 앉은 고급스런 간이 의자 뒤로 빙 둘러선 구경꾼들의 시선이 분주히 움직인다.
화가와 불과 1미터도 안된 곳에 떨어져 있는 여인 사이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한다.
셔터 스피드를 낮춘 구경꾼들의 눈동자들이 남긴 잔상 위로, 구경꾼들의 긍정과 부정의 고개 짓이 교차한다.
그순간 마로니에 공원의 찬바람이 구경꾼들을 비집고 화가의 다리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움찔. 화가는 짧은 떨림을 털고 이내 연필을 고쳐 쥔다.
알았을까? 순간 구경꾼들 사이에서 번지는 실망의 눈빛을.
침묵. 화가의 연필이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움직인다.
인중과 콧구멍 그리고 코언저리에 어둠이 깔리고, 눈가와 눈초리에 검은 그늘이 내리고.
여인의 목덜미에, 그리고 얼굴 주변에 그림자가 드려진다.
아! ~ ~
반전.
구경꾼들은 불과 몇 초전에 쏟았던 실망의 눈빛을 거둬들이고 감탄의 눈빛을 발광한다.
화가는 그제서 웅크렸던 허리를 한 번 펴고 여인을 바라본다.
남자 친구의 시선을 이미 교환한 여인의 눈가에 미소가 지나간다.
한껏 여유로운 화가의 손끝이 살짝 살짝 화폭의 여인을 매만진다.
한 번의 검은 칠이 빛을 만들고, 약간의 그림자가 여인의 얼굴에 생기를 심는다.
아! 어둠이 창조하는 빛이여 !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초상화를 받아 본 여인, 일순 자기의 얼굴이 맞는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곧 자기의 얼굴이라는 것을 남자친구와 구경꾼들로부터 여인은 확인받는다.
그리고 이내 여인의 얼굴의 환한 미소가 번지다.
실물보다 훨씬 더 분위기 있게 그려졌음을 그녀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구경꾼들이 흩어지는 사이 지미짚 카메라가 서서히 틸업되면서 뒤로 물러난다]
[초상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두 남녀가 서서히 멀어져 간다]
하얀 도화지, 그 평면의 공간에 입체감을 살려 주는 것은 어둠과 그늘이다. 어둠과 그늘이 있음으로써 밝은 부분이 비로소 더 밝아지고 의미를 갖는다. 오르막이 있기에 내리막이 있고, 밤이 있기에 낮이 있다. 슬픔을 알기에 기쁨을 알고, 죽음을 알기에 생명이 소중하다. 내가 있기에 너가 있고, 너가 있기에 내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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