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히는 듯했던 글로벌 금융위기의 불길이 지난 한 달간 더 거세게 번지면서 국내 주식시장이 심하게 휘청거리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달 15일 미국 4대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신청 이후 국내 증시에서는 107조 원이 사라졌다. 불과 한 달 새 올해 정부 예산(250조 원)의 40% 이상을 까먹은 셈이다.
특히 증시 3대 투자주체 중 외국인을 제외한 개인과 기관투자자 등 국내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자산 가운데 76조 원이 사라진 데다 글로벌 증시의 동반 폭락으로 해외펀드에서 잃은 돈 8조 원까지 감안하면 국내투자자들이 입은 총 평가손실액은 84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이 7천억 달러의 구제금융법안을 마련한 가운데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잇단 기준금리 인하로 정책 공조에 나서고 있고, 국내 증시의 안정을 위해 정부는 공매도 금지, 자사주 매입한도 확대, 장기 주식형 펀드 세제혜택 등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시장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국내외 증시의 추락이 멈추지 않고 있어 투자자들의 피해는 더욱 늘어날 공산이 크다.
◇ 끝없는 증시 추락
코스피지수 1,500선 붕괴 후 주식시장이 바닥을 다질 것이란 기대 속에 추석 연휴를 맞았던 투자자들은 아연실색했다.
금융불안의 뇌관으로 지목돼 온 미국의 양대 모기지(주택담보대출)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한 국유화 조치 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글로벌 금융위기가 추석연휴 마지막 날인 15일 전해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 소식에 다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휴 다음날인 16일부터 폭락세로 돌변한 국내 증시는 지난 9일까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12% 이상 곤두박질했으며, 코스피지수는 1,400대에서 1,200대로 물러서면서 2년 전인 2006년 8월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이로 인해 리먼브러더스 사태 직전 822조 원에 달했던 국내 증시의 시가총액은 715조 원으로 급감하면서 107조 원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국내 주식의 70% 이상을 보유한 개인.기관 등 국내 투자자들의 보유 주식에서만 76조 원이 날아갔다.
이런 가운데 본국의 금융위기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외국인들의 자금 이탈이 지속되면서 증시를 압박했다. 달러 부족으로 치솟는 원.달러 환율은 외국인들의 국내 투자자산 가치를 떨어뜨려 자금 이탈을 더욱 부추겼다.
한 달간 외국인은 1조8천억 원 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하면서 올해 들어 누적 순매도액을 1992년 증시 개방 이후 최대인 31조 원으로 늘렸다.
일각에선 최근 한 달간 국내 증시의 낙폭(-12.38%)이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24.9%)을 비롯한 영국(-20.4%), 프랑스(-20.5%), 독일(-21.6%), 일본(-25.0%) 등 선진국과 러시아(-37.0%), 브라질(-29.2%), 대만(-18.7%), 홍콩(-22.4%) 등 주요 신흥시장보다 양호하는 점 때문에 '선전(善戰)'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환율 폭등 등 금융불안이 장기화하면 충격이 수출과 내수 등 실물경제에까지 미칠 수 있어 경계를 늦출 수 없다는 반응이다.
위기가 고조될수록 풍부한 유동성으로 자금 회수가 쉬운 국내 증시에 대한 외국인들의 매도 공세가 더욱 거세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문기훈 굿모닝신한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외환시장 불안, 단기 자금시장 경색, 잠복한 실물경제 위축 위험을 감안할 때 연말 국내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있다"며 "눈높이를 최대한 낮추고 냉정하게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반토막난 주식형펀드
펀드평가사인 제로인에 따르면 국내 주식형 펀드의 1년 평균 수익률은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인 지난달 12일 -20.80%에서 9일 현재 -35.35%로, 해외 주식형 펀드는 -24.47%에서 -45.94%로 급속도로 악화됐다.
해외펀드 수탁고의 3분 1을 차지하는 중국펀드의 경우 -54.14%로 반 토막이 났고,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러시아펀드는 -57.08%까지 추락했다.
이에 따라 주식형 펀드 순자산총액은 같은 기간 15조9천억 원(국내 7조8천억 원, 해외 8조1천억 원)이 급감하면서 작년 8월 100조 원을 돌파한 지 13개월 만에 100조 원 밑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환매로 빠져나간 자금 8천400억 원을 감안하면 주식형 펀드에선 15조 원의 평가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손실이 단기간에 이처럼 커진 것은 불안심리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주가를 끌어내린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해외 악재가 여과 없이 국내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힌 것은 투자자금이 분산되지 않고 고점에서 특정 상품에 쏠렸기 때문이란 지적도 많다.
적립식 펀드의 확산으로 과거보단 개선됐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단기적인 투자 성향이 강해 펀드런(펀드 대량 환매)에 대한 우려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주식형 펀드에서는 국내 4천600억 원, 해외 3천800억 원 등 총 8천400억 원이 순유출됐다.
최근 정부에서 장기 주식형 펀드 가입자에게 소득공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서둘러 추진하고 있는 것은 불안 심리를 막고 펀드시장을 조기에 안정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 투자 문화 개선해야
전문가들은 정부 당국에서 내놓은 각종 증시 안정 대책들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일회성 정책에 그치지 않고, 장기 분산 투자를 정착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상길 제로인 전무는 "자칫 펀드별로 세제 혜택을 줄 경우 상품 수만 늘리고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증시를 안정시키고 장기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선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퇴직연금펀드를 활성화하는 것이 급선무다"고 말했다.
이병훈 대우증권 펀드리서치파트장은 "국내 펀드시장이 해외 악재에 취약한 것은 무엇보다 자산배분에 대한 인식이 약하기 때문이다"며 "분산투자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자 교육과 함께 '뒷북·몰빵' 투자를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불완전판매를 근절하기 위한 감독과 제도 보안이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위기를 통제하긴 어렵지만, 외부 악재에 취약한 국내 증시와 경제의 체질을 바꾸기 위한 거시적인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유신 SC투자증권 대표이사는 "미국과 유럽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동안 국내 투자자들까지 신뢰가 무너지면서 심리적인 쏠림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 경제나 증시는 규모는 작아도 개방 정도가 커 외부 악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며 "외환위기 이후 경제.금융 시스템을 한 단계 끌어올렸듯이 정책당국에서 이번 위기를 통해 드러난 문제와 이슈들을 면밀히 검토해 치밀한 위기관리와 신속한 대응력을 갖춰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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