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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씨도 민 씨 나름이다

"후손(後孫) = 자신의 세대에서 여러 세대가 지난 뒤의 자녀를 통틀어 이르는 말."

맞습니다.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한 친일파의 후손이 5세대만 이어져도 수십 명에 이릅니다.

이들이 상속 받은 땅의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대개 '수십 분의 1'로 공유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10살 먹은 어린애도 땅의 일부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후손'이 땅을 물려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손'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도덕성을 트집 잡을 때입니다.

도덕성의 잣대는 반드시 개인에게 대봐야지 '후손'과 같은 집단에 적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집합명사를 써버리면 항상 예외를 무시하게 되고, 무시된 예외는 정신적 피해를 입게 됩니다.

자신이 다른 후손과 한꺼번에 싸잡혀서 도매금에 넘어갔다고 억울해하기 마련입니다.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것.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야 편리한 일이지만 오류 가능성을 잔뜩 안고 있는 셈입니다.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이 그랬습니다. 민영휘는 아들이 넷입니다.

소실(첩)로부터 세 아들을 얻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후손과 셋째 아들의 후손은 완전히 다릅니다.

얼마나 다르냐 하면, 셋째 아들의 후손은

"너희는 민 씨가 아니다" 라는 얘기까지 들으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첫째와 셋째 아들의 후손은 사이도 썩 좋지 않습니다.

이들은 민영휘가 물려준 땅의 공유지분자로 등기부등본에 모두 이름이 올라있긴 합니다만.

국가가 환수해버린 땅을 찾자며 소송을 주도하는 쪽은 첫째 아들의 후손입니다.

 

셋째 아들의 후손은?

 

땅 되찾기 소송을 주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소송 명단에 아예 이름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 아들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 현재 서울 휘문고등학교의 민인기 이사장입니다.

민 이사장의 이름은 실제로 소장에 없고, 휘문고 법인도 없습니다.

민 이사장은 국가에 내놓을 재산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의 후손 쪽에서 정부를 상대로 같이 소송하자고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합니다.

민 이사장은 다만 민영휘가 은밀히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점도 객관적인 사료를 통해 인정 받아 조상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친일 청산하는 정부가 아닌 이상, 후손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친일파 재산의 국가 환수에 반발하며 '민영휘의 후손'이 소송을 내고 있다고 쓰면 곤란합니다.

민영휘 셋째 아들의 후손이 보기엔 어처구니 없기 때문입니다.

소송을 내지도 않았는데 사회에서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낙인 찍히고 매도당하면 황당합니다.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기자에 대한 강한 적대감의 뿌리는 여기 있었습니다.

기자를 그렇게 의심하는 취재원은 지금껏 경험한 적 없습니다.

궁금한 걸 묻기도 전. 30분 동안 그들이 쏟아내는, 언론에 대한 불신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언론은 민영휘 셋째 아들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을 인터뷰한 뒤, 소송을 주도하는 후손의 파렴치함을 비난하는 데 편의적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물론 첫째 셋째 구분하지 않고 그냥 '민영휘의 후손'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렇게 편집된 방송을 보면. 시청자들은 인터뷰에 응한 후손이 그저 못 됐다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언론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민 이사장 측으로선 정말 난처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는 저의 인터뷰 요청을 장고 끝에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이번 방송에서 '민영휘의 후손'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소송을 주도하는 민 씨와 재산엔 관심 없다는 민 씨.

재산엔 관심 없다는 민 씨 이야기는 원고에서 '좀 튄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끝까지 살려두었습니다.

시청자들이 민 씨도 민 씨 나름이라고 생각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재산엔 관심 없다는 민 씨 쪽을 그렇다고 미화한 것도 아닌데, 방송 다음날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잘 봤다고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 [뉴스추적] 8.15특집 '위대한 유산' - 친일파의 반격 다시보기

 

[편집자주] "세상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짜디 짠 소금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 !" 핸섬한 외모의 박세용 기자는 2005년 SBS 보도국에 입사해 사회부 사건팀을 거쳐 기자들이 만드는 시사고발 프로그램 '뉴스추적'에서 활약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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