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수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느끼게 된 기쁨 가운데 하나가 괜찮은 중고품을 싼값에 사는 재미였다. 중고품 매장을 하는 친구까지 있지만, 생활용품 가운데 중고품을 사 본 기억은 대학 자취생활 중에 못생긴 소형 냉장고를 샀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돈이 궁했던 미국 연수생활은 중고품 쇼핑의 묘미를 가져다줬다.
우리 가족이 1년간 정착했던 채플힐에는 PTA란 형태의 중고매장이 어느 곳보다 활성화된 지역이었다. PTA 매장은 학부모들이 버리기 아까운 중고품들을 기증하면 그것을 모아다 매우 싼 가격에 판매하고 그 판매대금을 지역내 학교 재정에 보태는 형태이다. 미국 여느 지역에도 이런 매장이 있지만, 그곳은 교육도시라 그런지 PTA가 다른 데보다 잘 되는 곳이었다.
잠시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갈 연수생들에게 PTA 매장은 잘 만 이용하면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쇼핑 명소가 될 수 있다. 새 것처럼 때깔 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손질하면 그 기능엔 전혀 문제가 없는 물건들을 새 상품 값의 수 십 분의 일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돈 25달러에 구입한 LaZBoy 안락의자입니다.>
집에 소파 겸 의자가 없어 허전하던 터에 PTA 매장에서 LaZBoy 상표의 안락의자를 25달러에 구입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상표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안락의자란다. 새 것이라면 가격이 수천달러에 이른다는 것이다. 겉 커버에 약간의 닳은 자국이 있긴 했지만, 내부구조나 기능에 전혀 손상이 없는 제품을 너무나 싼값에 살 수 있었기에 흐뭇했다. 특히, 어깨에 통증이 있어 어떤 의자도 불편했던 나에겐 처음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의자여서 더욱 그랬다.
여자들을 즐겁게 만드는 쇼핑품목도 있다. 꽤 유명한 상표라는데, 영국의 유명한 도자기 브랜드인 로열 알버트 커피잔 세개와 일제 명품 접시를 개당 5백원씩에 구입했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채플힐 주변엔 두 군데의 PTA 매장이 있다. 한곳은 카보로 지역에 있고, 다른 한 곳은 채플힐 시내에 있는데, 카보로에 있는 매장이 훨씬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고 있었다. 카보로 지역은 채플힐 옆에 딸린 작은 소도시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읍 정도의 동네로 전체적으로 낡고 엉성한 분위기가 묘하게 정감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가끔씩 카보로 PTA 매장에 들린 뒤, 부근 식당에서 뷔페식 아침을 먹으며 시골 동네의 정취를 맛보기도 했었다. 처음엔 잠깐 쓸 물건을 부담 없는 가격에 사려는 욕심에 찾았지만, 언제부턴가 PTA 매장과 그 주변은 색다른 기대감과 재미를 가져다주는 곳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가끔 들리는 카보로 지역 PTA 매장입니다.>
PTA 매장에선 온갖 잡동사니를 다 취급한다. 한마디로 일반 가정에서 쓰일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이 다 나오는 매장이라 생각하면 될 법하다. 가구에서 옷가지, 구두, 모자, 장난감, 가전제품, 운동기구, 책 등 없는 것이 없다.
이들 매장에서 하는 쇼핑의 제1 덕목은 발품과 안목이다. 내로라하는 중고명품들을 월마트 가격이하에 사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주 들러야 하고, 흠이 없는 물건을 고르는 눈이 있어야 한다. PTA 매장엔 알짜배기도 있지만 쓰레기 수준의 물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속이 상하는 일도 생긴다. 매장을 운영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흑인들인데, 이들은 대개 불친절한 편이다. 게다가 서툰 영어를 구사하는 동양인들을 불편해하고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한다. 괜찮은 물건을 살라치면 같은 물건에 욕심을 보이는 백인들에게 물건을 빼돌리다시피 팔아치우는 경우도 봤다. 하지만 우리처럼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면 그다지 서운할 것도 없었다.
PTA 매장에서 고른 물건 가운데, 작은 것들은 그냥 가격을 지불하고 차에 싣고 오면 되지만, 가구 같은 부피가 큰 것들은 매장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차까지 이동해야 한다. 카운터에 이야기하면 물건을 정리하는 남자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른바 ‘배달 서비스’가 없기 때문에 큰 물건들을 사러 갈 때엔 집에 밴 차량이 있으면 좋고, 없다면 물건을 찜해놓고 온 뒤 차를 빌려서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가구 같은 것은 내부구조에 손상이 없는 지 자세히 살펴야 하고 작은 결함은 집에 갖고 온 뒤 손을 좀 보는 게 좋다. 특히 천으로 된 것은 냄새가 많이 나는 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곳은 개를 키우는 가정이 많기 때문에 소파나 침대 등에 뜻밖에 ‘犬臭’가 진동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세탁이 힘든 상황에서 이런 냄새는 좀처럼 지우기 힘들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좋은 물건이 한꺼번에 나오는 때가 따로 있다. 아직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도시 전체에 각종 기부행사가 열린 다음엔 고가의 물건들이 무더기로 나온다고 한다. 채플힐 주변은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선 부촌으로 통한다. 미국에서 인구당 박사가 가장 많은 곳이 이곳이다. 듀크와 UNC 같은 유수의 대학이 자리 잡은 데다, 이들 대학의 교수, 대학병원 의사, 그리고 인근 연구단지의 고급인력이 살고 있어 소득수준이 높은 편이다. 채플힐이나 더램 지역의 학교들이 한꺼번에 기부행사를 벌인 이후엔, 부자동네에서 쏟아진 명품들이 PTA매장에 넘쳐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른 물건들은 잠깐 쓰고 버리기엔 아까운 것들이 많아 한국에 가져가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PTA 쇼핑은 연수 생활중 꼭 한번쯤 경험해 봐야 할 문화체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선 경험할 수 없을 뿐더러 색다르고 실속있는 쇼핑의 즐거움도 선사하기 때문이다. 괜찮은 물건이라도 오래되면 쉽게 새 것으로 바꾸곤 하던 우리네 한국의 생활습성에서 볼 때, 이 곳 사람들의 알뜰한 vintage 활용은 배워봄직한 지혜로 보인다. 백 달러 정도로 집안 살림을 거의 다 장만할 수 있는 곳이 이 곳 말고 또 있을까. 남이 쓰던 물건을 재활용하며, 그 가운데 새 것 같은 명품도 고를 수 있는 재미를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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