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의료법은 1973년 한차례 전면개정이 된 후에는 34년 동안이나 큰 틀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가는 의료환경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비판과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왔고, 의료공급자 위주로 만들어져 환자들의 편의와 권익 측면에서도 모자란 점이 많았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도 지난해 8월부터 의료법에 메스를 들이대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의료단체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실무협의단을 구성했고 10여차례에 거친 논의끝에 ‘의료법 개정안’ 시안을 마련했습니다.
복지부는 당초 이 시안을 29일 발표하고, 막바지 의견수렴과정을 거쳐 상반기중 입법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발표당일 아침, 복지부는 갑작스런 발표 취소와 일정 연기를 통보했습니다.
34년만의 의료법 개정이 가져올 거대한 의료환경 변화에 의료인 못지 않게 큰 관심을 가졌던 기자들은 당연히 ‘왜?’라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연은 그렇습니다.
의사협회 치과의사협회 한의사 협회 등 관련 단체들은 복지부가 마련한 의료법 개정안에 강하게 반대해왔습니다. 의료인의 입장에서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몇몇 쟁점조항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단체 대표들은 발표 당일 아침 유시민 복지부 장관에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시간이 촉박해 협회 내 의견수렴이나 논의과정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했고 유 장관이 이를 받아들여 향후일정 모두가 전면 연기됐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상당히 합리적 논의인 듯 보이지만 사실 이 과정에는 우리나라 이익 단체들의 뿌리깊은 ‘실력행사’ 관행과 보다 치밀하지 못한 정부의 일처리 문제점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의료인들에게 생사가 걸린 문제인 ‘의료법’이니 과거보다 환자와 소비자 중심으로 대전환되는 새 의료법의 조항들이 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의료법의 근간을 새로이 바로 세우는 ‘백년지대계’ 인만큼 이해당사자인 자신들의 의견을 더 포용해달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6개월간 각 단체 대표들이 논의를 거쳐 마련한 산물입니다. 그런 논의과정을 무시한 채 발표 직전 정부와 밀실에서 협상하고 절차를 뒤엎는 것은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의사협회 등은 만일 추가협상과정에서 본인들의 요구사항이 반영되지 않을 경우 면허반납과 대규모 파업 등 강경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의약분업 당시의 의료대란보다 더 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도 서슴지 않습니다.
환자들을 볼모로 한 위협화 실력행사도 과거와 현재, 별로 변화가 없어보입니다.
정부도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이익단체에 휘둘려 정책 집행을 미루는 사태가 벌어진 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130조항에 달하는 의료법을 모두 뜯어고치는데 10여차례의 회의만으로는 각계 의견수렴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공청회나 토론회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자신의 임기 내에 성과를 내놓으려는 조급증으로 인해 충분한 협의의 시간을 벌지 못했고, ‘연기, 취소..’ 등 해프닝에 가까운 일련의 일들로 34년만에 전격적으로 추진했던 의료법에 대한 개혁의지 또한 퇴색됐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료계의 실력행사, 또 갈등 조절에 실패하고 강한 반발을 우려해 발표를 철회하는 정부의 미숙한 일처리 모두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와 의료 단체들은 향후 10여일동안 추가 협상을 벌여 최종안을 도출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국민 건강을 위한 투쟁이다’라고 밝힌 의사협회는 각종 쟁점에 대해 정부와 국민을 설득할만한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할 경우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을 잃게 될 것이고, 정부 또한 ‘환자의 권익과 편리를 증진시킨다’는 의료법 개정안의 본래 취지를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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