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바빴던 하루였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 방송될 SBS스페셜 <걷기의 기적>편 내레이션 더빙과 종합편집을 막 마치고 나니 하루종일 곤두섰던 신경 다발 다발이 머릿 속에서 꽈리를 틀고 앉은 느낌입니다. 방송사에서 말하는 종합편집이란 건 내레이션을 입힌 촬영 편집본에 배경 음악과 현장음 따위를 믹싱해 넣고 디졸브나 페이드 인 아웃 등 화면 효과와 각종 자막을 입혀 하나의 테잎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프로그램 앞 뒤로 광고를 붙이기만 하면 방송 준비가 완료되는거죠.
그런데 머릿속 꽈리가 잘 풀리지 않는 건 내레이션 때문입니다. 두어 달 전 <걷기의 기적>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부터 염두에 뒀던 성우 분을 모셨는데 막상 오늘 녹음을 해놓고 나니 캐스팅이 적절했는지 판단이 잘 안서는거죠. 다큐라는 장르는 만들다보면 꼭 연출자의 의도대로 프로그램이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소설가가 자기 소설 주인공들에 끌려다니듯이 말이죠. 프로그램의 스타일과 내용은 다소 바뀌었는데 성우는 처음 그 분을 밀어붙인 거였습니다.
물론 오늘 내레이션해주셨던 성우는 이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입니다. 실력과 연륜을 다 갖춘 분으로 딱 들으면 누구나 “아~ 이 목소리~” 할 겁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최근 공중파 다큐에선 이 분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다는 겁니다. 요즘엔 성우가 아닌 연예인이나 MC들이 내레이션하는 게 유행입니다. 발음은 좀 떨어지더라도 친근감으로 승부하겠다는거겠죠. <걷기의 기적>의 성우 분처럼 또박또박한 발음과 안정된 진행은 슬쩍 뒷전으로 밀린 듯 합니다.
이쯤에서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시청률이 문제인거죠. 여러 기자들이 참여하는 뉴스 만들 때는 잘 실감을 못하다가 단독 프로그램을 만들다보니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요즘 먹히는 성우를 썼어야했나?’ 뭐 이런거죠.
흔히들 신문에서는 방송사 또는 방송업 종사자들에게 ‘시청률의 노예’란 타이틀을 선사합니다. 오로지 시청률 올릴 생각만하는 족속들로 보는거죠. 하지만 어떤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든 상대방의 관심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게 있을까요?
신문기자들도 마찬가질겁니다. 내가 쓴 기사, 출입처 사람도 관심없어, 독자도 반응없어, 주변 지인들도 아는 체 안해,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견딜 수 있을까요. 방송기자들 사이에 도는 우스개 소리가 하나있습니다. 편집부로 옮겨 TV에 안 나온 지 일년이 다 돼가도 “요즘 TV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사람들 많다고요.
제 책상 위에서 거의 일년을 굴러다니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바로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입니다. 앞 부분을 읽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더 이상 안 읽고 굴리고만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중 제일 간단한 이 책의 목차는 단 두 개, 원인과 결과입니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불안(status anxiety)의 원인은 첫째, 사랑결핍이랍니다.
‘사랑. 먹을 것과 잘 곳이 확보된 뒤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 저는 ‘아 왜 나는 나보다 고작 한 살 더 많을 뿐인 이 녀석처럼 멋진 생각을 해내지 못할까’ 몹시 자학했습니다만)
아기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마도 아기가 배고파서, 아파서, 똥 싸서 우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아실겁니다.(가끔은 존재 자체가 두려워서 울 때도 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걔들은 부모와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한 거고 ‘빈 서판(타불라 라사)’인 걔들이 그렇다는 건 인간의 본능이란 얘기가 아닐까요.
방송 종사자들이 스스로 시청률의 노예가 되고 신문기자들이 출입처에서 자기 기사 본 체 해주길, ‘기사 잘 썼데~’ 한마디 해주길 기대하는 것은 다 그것 때문일거라구요. (그러니 다같은 사랑의 노예끼리 너무 그러지 맙시다)
방송을 사흘 앞두고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불안’에 떨어야 하는 형편에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해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죠, 사실 성우가 아닙니다. 방송 시청률도 영화 흥행하고 비슷해서 들쭉날쭉 일관성도 없을 때가 많아 며느리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불안의 원인은 예측불가! 앗 그러고 보니 보통도 ‘불안’의 원인 중 마지막 다섯 번째에 ‘불확실성’을 꼽았네요. 책 그만 굴리고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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