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의 새 비전, "새로운 지향"
보수당이 2009년 총선 때 재집권을 위해 일종의 네거티브 전략으로 노동당의 실정(失政)을 물고 늘어지기로 마음먹고, 보건 의료분야에서 파산일보 직전에 몰린 NHS 문제를 선택했다고 살펴봤다. 그러나, 노동당의 실정만 공략해서는 허전하다. 보수당만이 내세울 수 있는 무엇인가 새로운 비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다. 카메론은 전당대회를 통해 보수당의 정체성과 관련된 새로운 구호를 들고 나왔다. '새로운 지향(New Direction)'이다. 전당대회장 곳곳에 이 문구가 내걸렸다. 1990년대 중반 블레어가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을 들고 나왔을 때, 현실적 경험 없이 국가를 궁지로 몰수 있다는 의도로 '위험한 노동당(Dangerous Labour)'으로 몰아쳤던 보수당이 이제 신세가 역전돼 '새로운(New)'이란 용어를 차용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다면 새로운 지향이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블레어의 '새로운 노동당'은 당의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기존 노동당의 이미지, 그러니까, 틀에 얽매여 현실보다 이론이나 전통, 특히 집산주의(集産主義, collectivism)적 전통을 고집하는 완고한 사회주의적 이미지의 노동당에 자유주의적 요소를 가미해 좀더 유연한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노력이었다. 블레어는 이를 위해 당내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당헌(黨憲)까지 고치는 공을 들여야 했다. 그 덕에 집권에 성공했지만... 카메론의 "새로운 지향"은 일견 블레어의 "새로운 노동당"과 약간 궤를 달리한다.
"시민 참여…동반자 관계"
블레어의 '새로운 노동당'은 당이 갖고 있는 집산주의적 색채를 희석(稀釋)시키는 이념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보수당이 추구하는 '새로운 지향'은 이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념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당을 실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색채로 바꾸는 시도. 그러나, 목표는 하나다. 기존의 이미지로는 집권이 어렵다고 보고, 국민 지지를 얻고자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세. 카메론이 방법론으로 제시한 화두(話頭)는 '시민 참여, 시민동반자 관계(Civil Partnership)'다. 보수당이 시민과 함께 하는, 시민 속에서 살아 숨쉬는, 시민의 정당임을 강조하는 문구다.
사실 보수당은 그 동안 일반 국민들로부터 부자들의 정당, 일반 서민과는 거리가 있는 정당, 귀족적이며 계급주의적인 정당, 노인들의 정당, 고전적 자유경제 원리에만 충실한 정당, 그래서 너무 딱딱한 이미지의 정당으로 비쳤던 게 사실이다. 어느 나라나 보수정당이 일정부분씩 갖는 이미지의 한계다. 보수당은 이를 불식시켜 국민 속으로 다가서는 길만이 차기 총선에서 정권을 되찾는 지름길로 본 것이다. 그래서, 카메론 당수가 어린이들과 만나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는 장면이나 집안에서 설거지 하는 모습같은 가정적인 면모를 강조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당대회에서 시민 피부에 닿는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인 세금 정책에서도 일단 감세를 반대하고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해 복지를 축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부자정당에서 서민정당으로
전통적인 지지층인 재계나 부유층의 오랜 주장, 즉 감세를 지지할 경우 서민정당으로서의 변신, '새로운 지향'은 물 건너 가게 되므로 보수당 일각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감세를 반대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최고 명문구단으로 등극하고 있는 프리미어 리그 첼시 구단의 본거지인 런던 첼시(Chealsea)지역 사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식 한 명에 연간 3,4천만 원도 마다하지 않는 부유층을 위해 세금을 줄인다면 연간 소득이 3,4천만 원에 불과해 자식을 무료 공립학교에 보내야 하는 다수의 국민들로부터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일단 국민 다수의 마음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전략, 이미 블레어가 1997년 총선에서 성공한 전략이다.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당헌개정을 통해 유연한 면모로 일반시민 속으로 파고드는 전략.
그러다 보니 카메론은 감세같은 문제보다 은행 이자율(영국은 거의 대부분의 시민들이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집을 사고, 평생 이자를 원금을 갚아 나간다)에 높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우리 모두가 주택저당을 잡히지 않았느냐(We've all got mortgages)"는 말로 자신도 주택저당으로 집을 샀고, 그렇기 때문에 은행 이자율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카메론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머독 산하의 무료 신문 '런던 페이퍼'가 취재한 결과 카메론의 주장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 카메론은 집 두 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노팅힐(Notting Hill)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125만 파운드(약23억 원, 영국 평균 집값의 4배가 넘는 금액)짜리 주택에 저당금이 한푼도 없었던 것. 다행히 옥스포드(Oxford)에 갖고 있는 또 한 채, 65만 파운드(약 12억 원)짜리 집에는 저당금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당금이 있는 것은 맞지만,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가족과 삶의 질
아무튼 이것이 현재 영국 보수당의 모습이다. 노동당의 실정을 공략하기 위해 의료보건 분야를 붙들고 늘어지고, 새로운 지향(New Direction)의 방법론으로 일반 시민 동질감을 확보해 시민들의 참여(Civil Partnership)를 구하는 길. 4일 전당대회 연설에서도 카메론은 결론부에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 실생활에서 국민의 만족과 행복감을 높이는 일에 있음을 강조한다. 국가 운영 전반에 걸쳐 자신의 소신을 밝히면서 맨 마지막에 정리한 말은 '가족(Family), 공동체(Community), 사회(Society), NHS, 환경(Environment), 삶의 질(Quality of life)'의 6개 주제다. 가족의 가치를 맨 앞에 두며, 아이들 보육 예산을 늘릴 것임을 약속한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말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내가 정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동기가 바로 이런 말들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조국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 일어섭시다.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se are the things that matter most to me, These are the things that drive me in politics. And I want us here to be optimistic about their future. We are getting ready to serve again. Standing up for what we believe. The best is yet to come." '삶의 질'이 극대화되는 시점, 가장 좋은 때라는 의미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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