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졸 출신 총리신화
보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보수당 존 메이저(John Major)정권을 들여다 본다. 메이저 총리는 참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전임 대처가 실제 정책에서 뿐 아니라 인상부터 철혈재상(鐵血宰相)의 이미지였다면 메이저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할까. 90년대가 시작되는 1990년 11월 대처에 이어 47의 나이로 총리에 오른 그는 부자집 큰 아들 같은 인상과 달리 참 고생스런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신청한 그의 직업은 놀랍게도 버스 기사. 10대 때 버스기사를 지망한 그의 모습에서 성장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놀라운 점은 미래의 영국 총리가 첫 구직 즉, 버스기사직(職)에 보기 좋게 낙방한 것. 키가 너무 크다는 게 이유였다. 요즘 같으면 인권단체가 나설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럴 여유는 없었으리라. 버스기사가 되지 못한 그는 1959년 16살에 보험회사 사환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곧바로 직업을 바꾼다. 런던 전기조합(London Electricity Board)으로 갔는데, 이 곳은 공교롭게 훗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도 일한 직장이다. 무려 2명의 수상을 배출한 직장 치고는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다. 메이저는 가난 탓에 일찍 사회에 진출했지만, 그만큼 정치에도 빨리 눈을 떠 이미 21살부터 시의원에 도전하는 의지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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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처의 불명예 퇴장속에 보수당은 넘겨받은 메이저 총리. 넉넉한 표정의 메이저는 재임기간 내내 시련을 겪는다. |
1968년 25살에 시의원이 돼 보수당정치인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 메이저는 1983년 40살에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이때 토니 블레어도 노동당 후보로 30살의 나이로 처음 국회에 진출한다. 메이저는 국회의원이 된 뒤 대처 총리의 신임을 얻게 된다. 7년 뒤 1990년 대처가 당수 자리에서 물러날 때 메이저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비록, 더글라스 허드(Douglas Hurd)와 2차까지 가는 표대결을 펼쳤지만, 승리를 거두고 1990년 11월 27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전직 당수이자 총리의 지명을 받고도 이렇게 고생한 이유는 대처가 워낙 보수당 의원들의 인기를 잃은 상태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2) 메이저 외교: 걸프전과 마스트리히트 조약
그가 총리에 오르자 마자 세계가 전쟁의 화마(火魔)에 휩싸였다.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걸프전을 일으켰다. 걸프전의 가장 큰 의미는 미국이 중동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지만, 걸프전쟁을 미국이 주도하면서 다국적 협조보다 미국의도 아래 중동문제를 다룰 발판을 마련했다. 걸프전은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비롯된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각 철군을 요구했다.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자, 이듬해 1991년 1월 17일 미국군 43만명을 중심으로 결성된 유엔 다국적군 68만명이 이라크를 공격해 한 달 열흘만인 2월 28일 이라크를 패퇴시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이라크문제를 자기 의지대로 관철해 나갔고, 12년 뒤 아들 부시 대통령 때 재침공할 명분도 얻게 된다. 걸프전에서 메이저 총리는 전임 대처와 다른 모습이었다. 강공 일변도의대처와 달리 메이저는 부시를 설득해 이라크 비행기의 비행금지 구역(no-fly zones)을 설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쿠르드족과 시아파 이슬람교도를 보호하는 안전판이 됐다.
유럽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Treaty of Maastricht)은 전통적인 보수당의 반 유럽 정서와 친미 정서에 당내 반발이 심했던 외교문제였다. 메이저가 집권한지 걸프 전쟁에 이어 나타난 정치적 시험무대였다고 볼 수 있다. 1991년 12월 10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합의되고, 이듬해인 1992년 2월 7일 유럽공동체(EC) 외무장관회의에서 정식으로 조인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한마디로 경제 통합에 머물렀던 기존 유럽공동체를 정치적 차원으로 확대해보자는 새로운 도전이다. 유럽중앙은행을 창설해 단일통화를 사용하고, 공동 헌법을 만들어 유럽의 실질적인 통합과 발전을 기해보자는 '통일 유럽국가' 구상이라고 할까. 유럽연합(EU)으로 이름을 바꾸고, 최대의 난제 가운데 하나인 단일통화를 2001년 출범시켰지만, 단일 헌법에서 벽에 부딪친 유럽통합.
그러나, 실패를 예견하는 것은 섣부르다. 지금도 유럽 선진국은 지방자치제를 고도로 발전시켜 '한 지붕 여러 가족 국가'를 실현중이어서 이를 유럽 차원으로 확대하는 차원인 만큼 전망이 어둡지 많은 않다. 유럽의 일부가 아닐 수 없는 영국은 조약 비준 과정에서 유럽과 하나가 되느냐 아니냐로 국론이 갈라졌고, 메이저 정부는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보수당 안에서 일부세력이 메이저의 비준방침에 반기를 들면서 메이저의 지도력은 크게 손상됐다. 가뜩이나 전임 대처가 보여준 카리스마가 부족하던 그에게 당내 반발은 치명상이었다. 메이저는 유럽과의 화친을 추구하는 야당, 노동당의 지원으로 비준할 수 있었다.
3) 메이저 내정: 경제 침체, 잇단 스캔들...
80년대 말 이후 날로 인기가 떨어져 수상까지 교체했던 보수당. 1992년 총선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예측됐지만, 보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가까스로 4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이저 총리 집권 2기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워낙 근소한 차이로 승리해 야당인 노동당의 도전이 거세진데다, 경제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세계 경제가 80년대의 호황을 지나 하강국면에 들었다. 한국도 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세계 경제 조건은 도외시한 채 전두환의 치적으로 미화되지만), 90년대 중반이후 어려움을 겪다 1997년 IMF를 맞는다. 메이저 정권은 1992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엄청난 파운드화 손실을 가져와 사퇴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시련속에서도 메이저 총리는 1993년에 "기본에 충실하자(Back to Basics)"는 캠페인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게 독이 됐다. 경제, 교육,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원칙론을 제시한 것인데, 뜻하지 않게 정치인들의 개인적 도덕성 문제로 번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에 보수당 의원의 추문이 터지면서 의원들이 잇따라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보수당의 인기가 날로 떨어지는 가운데, 1995년에는 당권에 도전하는 의원까지 생겨나 메이저는 일단 당수 직을 사임한 뒤 투표를 거쳐 다시 당수직을 맡는 수모도 겪었다.
총선을 앞둔 1996년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은 말만 집권당이지 노동당에 크게 뒤졌다. 1996년 12월에는 노동당이 하원(House of Commons) 의석 수에서 보수당을 앞질렀다. 가까스로 총리직을 유지하던 메이저는 어떻게든 1997년 3월 총선을 연기해보려 애썼다. 경제를 좀 살려 놓은 뒤에 총선을 실시하면 보수당의 인기가 올라 재집권 할 수 있을 것 아니냐는 바람에서다. 그러나, 총선연기는 불가능했다.
4) 1997년 총선 보수당 참패
1997년 총선은 보수당에게 재앙이었다. '1832년 선거법 개정'(the Great Reform Act of 1832)이후 보수당으로서는 최악의 패배였다. 노동당은 418석을 얻었고, 보수당은 고작 165석, 자유민주당이 46석을 얻었다. 메이저는 당선됐지만, 현직 장관을 비롯해 무려 179명의 보수당의원이 낙선했다. 1997년 5월 2일 정오 다우닝가 10번지 수상 관저를 떠난 메이저는 "막이 내리면 배우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법(when the curtain falls, it is time to get off the stage)"이라면서 기자들에게 가족과 크리켓 경기를 보러 가겠다면서 6년 반의 총리임기를 마쳤다. 그는 크리켓에 광적인 사람이었다.
자유 민주당(Liberal Democrats)의 파디 아쉬다운(Paddy Ashdown)의원의 표현처럼 그는"예의 바르고 존경할만한 인물(decent and honourable man)"의 덕목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이는 카리스마나 능력이 결여된 인물이란 이미지로도 비쳐졌다. 지적 능력이나 정치적 수완도 없이 그저 사람만 좋은 것 아니냐는 인식이 그와 보수당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정당 지도자로서 날로 깊어만 가는 당내 분열을 극복하고, 또 스캔들로 얼룩지는 보수당을 구해내기에는 힘에 부쳤다. 보수언론의 엄호사격도 이젠 더 이상 약발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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