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 폭력이라는 칙칙한 세계를 어둡게 다루는 ‘느와르’ 장르는 2차 대전 전후 대거 만들어졌던 할리우드 B급 범죄영화를 지칭하는데서 유래했는데 우리들에게는 오리지날 의미보다는 이를 변용한 ‘홍콩 느와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합니다. 한국영화에서는 이 장르가 그리 큰 재미를 못 본다는 속설 아닌 속설도 있습니다. 지난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배우들의 열연과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성취했음에도 극장 개봉땐 큰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뒤 남성 관객층을 중심으로 ‘그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 죽이더라’라는 입소문이 뒤늦게 퍼지기도 했죠.
[사생결단]은 마약을 둘러싼 경찰과 마약범을 소재로 본격 느와르를 표방하고 등급도 ‘애들은 가라!’(영화 내용 진짜로 애들 보면 안되겠더라구요...)인 18세 관람가를 받았을 정도로 ‘쎈’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IMF가 터진 이후 구조조정, 실직 등으로 부산에서는 필로폰이 급속하게 퍼집니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마약을 다루는 중간상들이 활개를 치고 경찰과 검찰은 이들을 잡기 위해 전담반을 구성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모범 경찰과는 거리가 먼 만년 경장 도진광(황정민)은 4년전 마약계 보스 장철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선배가 장철이 뿌린 염산에 얼굴이 녹아내리며 순직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됩니다. 공교롭게 이후 홀로된 선배의 부인, 즉 형수와 동거를 하며 장철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나갑니다. 노회한 장철은 검찰에서 중간판매라인 하나를 부는 조건으로 보석으로 풀려나 중국으로 도피했지만 도 경장은 장철을 잡아넣겠다는 집념밖에 없습니다.
연산동 유흥가를 장악하고 마약 중간 판매상으로 마진 300%의 알짜 벤처사업가라고 자부하고 전국구 진출을 꿈꾸는 이상도(류승범)는 우연한 순간 도경장에게 약점이 잡혀 야당(범죄조직에서 경찰과 내통하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칭하는 그 바닥의 은어라고 합니다.)생활을 부업으로 삼게 됩니다. 도경장에게 협조하며 꽤 굵직한 마약범을 검거하려 하는데 돌발사고가 발생해 마약범은 죽고 상도는 당초 약속과 달리 감옥에서 8개월을 썩게 됩니다.
출소후 새로운 마약상에게 자기 나와바리(구역)를 빼앗기고 재기하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이번에는 도경장을 협박해 자신의 구역에서 불법행위를 용인받고 사업자금까지 받아냅니다. 도경장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 장철을 잡기 위해 경찰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다시 거물이 되어 돌아온 장철은 검찰과 적절한 공존관계를 유지하며 철저하게 베일에 둘러싸인 채 마약사업을 키워나갑니다. 상도는 정철 수하로 들어가 정보를 빼내려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도경장은 정철에게 최고 형량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마약 제조현장을 덮치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최호 감독은 이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2년 동안 부산에 살다시피 하며 경찰, 검찰, 마약상, 유흥가를 집요하게 취재했습니다. 그 가운데 부산 마약계의 산 증인을 만나 큰 도움을 받게 되고 이 인물은 영화에 ‘기술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고증에 핵심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리얼리티는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마약의 제조, 유통과정은 물론 마약 중독자의 행태와 후유증까지 너무 적나라해서 소름이 오싹할 정도입니다.
두 연기파 배우 황정민과 류승범의 인물 성격도 느와르에 걸맞습니다. 사익인지 공익인지 애매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두드려 패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폭력배의 불법행위를 묵인하고 약점 잡힌 사람들한테서 돈까지 뜯어냅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경찰과는 거리가 멉니다. 류승범이 연기한 마약중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퇴한 마약상인 늙은 삼촌에게 반말은 물론 욕설을 서슴지 않고 마약으로 돈을 벌지만 자신은 마약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독한 인물입니다. 보통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멋있다’라는 감정보다는 ‘뭐 저런 한심한 놈들이 다 있나’싶을 정도입니다.
둘의 연기는 봄의 에너지를 받아 일시에 꽃망울을 터트린 벚나무나 익을 대로 익어 터질 듯 한 가을 과일을 보는 듯 합니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묘한 공존관계에서 이들이 주고받는 걸쭉한 부산 사투리의 욕설과 대사는 생생하면서도 많은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상도의 삼촌이자 상도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은퇴한 마약판매상으로 왕년의 액션배우 김희라가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합니다. 환갑의 나이지만 10여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느라 거동도 불편하고 많이 늙어 보이지만 왕년의 대배우다운 카리스마와 명연기를 보여줘 반갑습니다. 시사회 무대인사때 그 어느 젊은 배우들보다도 우렁찬 목소리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한다. 오래 살다보니 요즘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영화 보고나서 맘에 안 들면 나를 패줘라’라며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명품점 ‘럭셔리’ 여사장으로 마약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비운의 여자로 분한 추자현은 이 영화에서 180도 이미지 변신을 시도합니다. 특히 마약 체험 후 벌이는 지옥도 같은 섹스와 중독 후유증을 연기하는 장면은 그 어떤 공익광고보다 더 효율적으로 마약의 폐해를 느끼게 해줍니다.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상도의 부하로 나오는 온주완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습니다.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해 현실보다 더 현실감 있는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명연기, 느와르라는 장르에 걸맞게 거칠고 투박한 촬영과 빠른 화면전개 등 장르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입니다. 폭력과 범죄의 세계에 넘치는 것은 의리와 우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 비정한 비인간성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마지막 부분에 도경장이 상도와의 클라이맥스를 넘긴 뒤 덧붙이는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끝냈으면 더 ‘쿨’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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