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상 대사면이 기정사실화 되는 분위기입니다. 이제는 아주 구체적으로 사면 대상까지 거론되고 있습니다. 어제 박병석 열린우리당 기획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이랍니다.
사면안 내용을 볼까요. 특별사면 대상자는 4백만 명, 일반사면에 준하는 사면 대상자는 250만 명이라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에 단행했던 대사면 때의 552만여 명보다 백만 명이나 많은 숫자입니다.
특별사면 대상자는 대부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면허가 취소되거나 정지된 사람들, 벌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벌점이 사면되는 사람이 지난 6일을 기준으로 366만 명이라고 하는군요. 그나마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나 면허취소를 당한 사람은 제외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단순 과실범, 행정법규 위반사범, 식품단속법, 식품위생법 위반사범이 이른바 생계형 범죄라는 명목으로 들어가고, 지난 2000년에 있었던 16대 총선 때까지의 선거사범이 역시 대상에 들어가 있습니다.
일반사면 대상으로 거론된 약 250만 명은 오는 8월 10일 이전에 확정되는 법정형 5년 이하의 경미한(?) 행정법령 위반자라고 합니다. 대상 법률도 예시가 됐는데 이를테면 향토예비군설치법, 민방위기본법, 주민등록법, 자동차운수사업법, 옥외광고물관리법, 건축법, 근로기준법, 국민연금법, 대기환경오염법 등입니다.
대선자금 관련 정치인, 비리 공직자와 경제인, 사형수의 무기징역 감형, 고령자와 중병 환자, 임신부에 대한 사면은 추후 검토 대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단 규모만 봐도 한동안 엄청납니다. 우리 사회의 각종 제재 수단을 운영하는 기관들이 상당 기간동안 처리한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겁니다. 경찰, 검찰, 법원에서 처리한 수백만 건의 사건이 모두 무효화되는 것이니까요.
도대체 열린우리당은 왜 사면 얘기를 들고 나왔을까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겁니다만 불법 정치자금이나 선거법 위반 등으로 처벌을 받은 동료 정치인들에 대한 사면이 중심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당 안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특등 공신이었던 정대철씨가 사면 논의의 출발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야당이라고 해서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천정배 법무 장관이 야 3당 대표에게 인사를 다녔는데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서도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정치인 사면을 위해 국민 통합이라는 논리를 덧씌우고 거기에 맞추려니 수백만 명을 사면하는 안이 만들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안 그래도 지난 석가탄신일에도 분식회계를 한 경제인들을 사면하면서 대통령의 측근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슬그머니 끼워넣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엄청난 여론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를 경제살리기를 명분으로 사면한 것이지요. 지금도 법조계와 검찰, 법무부에서 사면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고 언론에서도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내고 있지만 기어코 대폭적인 사면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사면은 일종의 비상구 같은 겁니다. 법에 규정돼 있다고 모든 권한을 함부로 다 쓸 수는 없는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에 대해서 정부, 여당이 했던 말입니다. 탄핵이라는 것도 비상구 같은 것이지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도저히 사회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라는 말입니다.
특별사면은 실정법상 유죄 선고가 불가피하지만 도저히 딱한 사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경우에 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의 경우처럼 신청을 받아서, 양형이 심히 부당하거나 달리 정말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로 제한해야 합니다. 일반사면은 사회적인 가치관이 바뀌거나 정책의 변화라는 중대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그런 ‘비상’의 수단이 너무 ‘일상’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수단에 자꾸 기대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눈치가 보여서 이번에는 불법 대선자금 관련 정치인을 사면 대상에서 빼놓았다가 연말에 사면을 한다는 말도 있는데, 국민을 우롱한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사법부의 결정을 무효화하는 일종의 비상 조치가 사면입니다. 철따라, 기념일마다 이렇게 행정부가 사법부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그것이 정치권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회 운동이라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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