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프 핵심요약
시민 과학 기반의 '팬티 지수' 연구: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진과 1천 명의 시민이 전역에 면 팬티 2천여 장을 묻고 분해 정도를 분석해, 복잡한 장비 없이 토양 미생물 및 생물 활동성을 직관적으로 측정하는 지표를 개발했습니다.
토지 이용 및 토양 건강의 상관관계: 연구 결과 개인 정원처럼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에서 분해가 가장 빨랐던 반면 잔디밭은 생물 활동이 가장 낮았으며, 분해 속도는 토양 미생물 활동뿐만 아니라 수분, 온도, 비료 남용 여부 등 복합적 환경 요인을 반영함을 확인했습니다.
기후 변화 대응과 시민 참여의 가치: 부식질과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은 미생물 활성화뿐만 아니라 가뭄 시 수분 유지 능력도 우수함을 도출했으며, 240명의 시민이 논문 공동 저자로 등재되는 등 대규모 토양 데이터 수집을 위한 '시민 과학'의 성공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5년 전, 스위스 과학자들이 시민들에게 이상한 부탁을 했습니다. '면 팬티를 땅에 묻어주세요.' 한두 장이 아니었습니다. 시민 1,000명이 스위스 전역에 2,000장 넘는 팬티를 묻었습니다. 두 달 뒤 다시 팬티를 파냈더니 어떤 건 거의 그대로였지만 어떤 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분해됐습니다. 대체 땅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 왜 하필 팬티였을까
실험이 시작된 건 2021년 스위스 취리히대와 연방 농업연구기관 아그로스코프가 '프루프 바이 언더팬츠(Proof by Underpants)', '팬티로 증명하기'라는 독특한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피아 비비아니 |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 공동연구자
저는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위스 전역에 2,000장이 넘는 팬티를 묻었습니다.
저는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위스 전역에 2,000장이 넘는 팬티를 묻었습니다.
전국에서 시민 1,000명이 참여해 정원과 농경지, 초원 등 자신의 주변 땅에 정해진 방법대로 면 팬티와 티백을 묻었습니다. 2개월이 지나 팬티를 다시 꺼내 사진을 찍고 토양 샘플과 함께 연구진에게 보냈습니다. 왜 하필 팬티였을까요? 연구자들이 원한 건 사실 팬티가 아니라 '면'이었습니다. 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가 얼마나 분해되는지를 보려던 겁니다.
굳이 팬티를 고른 데는 시민들 관심을 끌려는 의도와 함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냥 면 조각이라면 분해가 많이 됐을 때 아예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팬티는 면 부분이 사라져도 고무줄과 봉제선이 남습니다. 얼마나 분해됐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묻었던 물체를 다시 찾아낼 수도 있는 겁니다.
2. 누가 팬티를 먹었나
흔히 볼 수 있는 흙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마르셀 반 데어 하이덴 |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 공동연구자
우리 발 아래 토양에는 엄청난 생물다양성이 있습니다. 거대한 우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가 있는 겁니다.
우리 발 아래 토양에는 엄청난 생물다양성이 있습니다. 거대한 우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가 있는 겁니다.
시몬 로망 | 2024년 후속 프로젝트 참가자·방송인
여기는 작은 생물과 미생물로 가득합니다. 지렁이, 진드기, 아메바, 곰팡이, 박테리아, 모두 함께 하나의 좋은 팀을 이루죠.
여기는 작은 생물과 미생물로 가득합니다. 지렁이, 진드기, 아메바, 곰팡이, 박테리아, 모두 함께 하나의 좋은 팀을 이루죠.
취리히대 연구진은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절반 이상이 땅 아래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생물들이 죽은 식물이나 낙엽 같은 유기물을 분해하고 다시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영양분으로 바꿉니다. 이들에게는 면 팬티 역시 분해할 수 있는 유기물이었습니다. 똑같은 팬티를 똑같은 기간 묻었는데 A는 거의 사라지고 B는 비교적 멀쩡하다면 두 땅에서 토양 생물의 활동 정도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피아 비비아니 |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 공동연구자
우리의 가설은 팬티가 분해될수록, 그리고 팬티가 더 많이 먹힐수록 활동성 높고 다양한 생물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설은 팬티가 분해될수록, 그리고 팬티가 더 많이 먹힐수록 활동성 높고 다양한 생물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022년 중간 분석에서는 유기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연구진은 이걸 눈대중으로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분해된 팬티를 파란색 배경 위에 펼쳐놓고 사진을 찍은 뒤 이미지 분석 프로그램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면적이 사라졌는지까지 계산했습니다.
3. 전국 2,000장을 꺼내봤더니
5년에 걸친 분석 끝에 지난 8월 최종 연구 결과가 국제 학술지 'Plants, People, Planet'에 발표됐습니다. 팬티가 분해되는 정도를 가장 크게 좌우했던 건 그 땅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즉 토지 이용 방식이었습니다. 가장 빠르게 분해된 곳은 개인 정원이었습니다. 유기물과 영양분이 풍부해 토양 생물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반대로 토양 생물의 활동이 가장 낮게 나타난 곳은 잔디밭이었습니다. 농경지와 초원은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같은 팬티였지만 어디에 묻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 겁니다.
연구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팬티의 분해 정도를 이용해 복잡한 장비 없이도 토양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간단한 지표를 만들 수 있을까?
세바스티안 프란츠 벤더 |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 공동연구자
한 가지 목표는 팬티가 토양 건강을 보여주는 간단한 지표로서 얼마나 적합한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팬티를 통해 정확히 어떤 걸 증명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진행하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비로소 밝혀내고 있는 중입니다.
한 가지 목표는 팬티가 토양 건강을 보여주는 간단한 지표로서 얼마나 적합한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팬티를 통해 정확히 어떤 걸 증명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진행하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비로소 밝혀내고 있는 중입니다.
연구진은 이를 '팬티 지수'로 제시했습니다. 똑같은 면 팬티를 땅에 묻었다 꺼내 얼마나 분해됐는지를 비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 생물의 활동을 누구나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4. 팬티가 많이 썩으면 좋은 땅?
그렇다면 팬티가 가장 빨리 사라지는 땅이 가장 좋은 땅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팬티의 분해 속도에는 온도와 수분도 영향을 미칩니다. 너무 춥거나 건조하면 토양 생물의 활동 자체가 크게 줄어듭니다. 또 영양분이 지나치게 많아도 분해 속도가 빨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숲처럼 자연 상태에 가까운 생태계에서 영양분이 지나치게 많다는 건 오히려 자연적인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개인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팬티가 아주 빨리 분해됐다면 연구진은 비료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팬티가 많이 썩었다 = 무조건 건강한 땅'이라는 단순한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팬티 지수는 토양 건강의 절대적인 점수라기보다 땅속 생물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토양의 상태가 어떤지를 쉽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지표에 가깝습니다.
5. 팬티에서 가뭄으로
팬티를 파묻은 실험에서 뜻밖의 문제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가뭄입니다. 2022년 공개된 중간 분석에서 농경지의 부식질 함량은 개인 정원보다 평균 23% 낮았습니다. 부식질이 많은 토양일수록 팬티가 빨리 분해됐을 뿐 아니라 물을 더 많이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유기물이 풍부한 흙은 토양 생물에게 좋은 환경인 동시에 물을 붙잡아두는 능력도 더 뛰어났던 겁니다.
기후 변화로 가뭄이 잦아질수록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을 농작물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결국 땅이 물을 얼마나 붙잡아 둘 수 있느냐와 연결됩니다. 팬티를 묻어서 시작한 실험이 결국 우리가 먹는 작물과 기후변화 문제까지 이어진 겁니다.
6. 좋은 흙은 어떻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땅속 생물들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최종 연구에서 연구진은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땅이 그대로 노출되지 않도록 식물 등으로 계속 덮어두고, 퇴비 같은 유기물을 공급하고, 한 작물만 계속 재배하기보다 다양한 작물을 돌려 짓는 겁니다. 또 광물질 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도 토양 생물의 활동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
7. 과학자 몇 명이 못 할 일을 시민 1,000명이 했다
이 실험에서 팬티만큼이나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팬티를 묻은 사람들입니다. 연구팀이 스위스 전역 1,000곳을 찾아다니며 땅을 파고 팬티를 묻은 뒤 두 달 뒤 다시 찾아가 모두 파내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에게 '팬티를 묻어주세요'라고 했더니 1,000명이 참여했습니다.
피아 비비아니 | '팬티로 증명하기' 프로젝트 공동연구자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해 주시고 팬티를 묻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올려주신 수많은 사진들과 발견한 토양 생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주신 내용들은 정말 멋집니다. (프로젝트) 지도를 살펴보는 일도 정말 즐겁고 멋진 일이네요.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해 주시고 팬티를 묻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올려주신 수많은 사진들과 발견한 토양 생물들에 대해 자세히 적어주신 내용들은 정말 멋집니다. (프로젝트) 지도를 살펴보는 일도 정말 즐겁고 멋진 일이네요.
정원과 초원, 농경지 등 스위스 전역에서 자료가 모였고, 그 결과 만들어진 데이터는 스위스 토양 생물 활동을 다룬 가장 포괄적인 데이터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그리고 최종 논문의 저자 목록을 보면 조금 독특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240명의 시민이 최종 논문의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팬티를 묻고 두 달 뒤 파냈던 평범한 시민들이 5년 뒤에는 과학 논문의 공동 저자가 된 겁니다. 연구진도 참가자들에게 각자 자신의 토양 분석 결과와 토양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하기 위한 조언을 돌려줬습니다. 과학자에게는 혼자서는 모을 수 없는 데이터가, 시민에게는 자신이 밟고 사는 땅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돌아갔습니다. 과학자와 시민이 함께 과학적 데이터를 만들어낸 이른바 '시민과학'이었던 겁니다.
8. 결국 팬티가 보여준 것
시작은 조금 우스꽝스러웠습니다. 팬티 2,000장을 땅에 묻는다. 하지만 팬티가 사라지는 과정을 따라가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박테리아와 곰팡이, 지렁이와 수많은 토양 생물, 이들이 만들어내는 유기물의 순환과 물을 저장하는 흙, 그리고 그 위에서 자라는 우리가 먹는 작물까지.
시몬 로망 | 2024년 후속 프로젝트 참가자·방송인
땅속에 생명이 없다면, 땅 위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땅속에 생명이 없다면, 땅 위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보고 싶었던 건 처음부터 팬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밟고 있지만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 발밑의 생태계였습니다.
Deep Dive Q&A
Q1. 스위스 연구진은 왜 일반 면 조각이 아닌 '면 팬티'를 땅속에 묻어 실험을 진행했나요?
A1. 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가 토양 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정도를 측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반 면 조각은 토양 미생물과 지렁이 등에 의해 분해되었을 때 땅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위치를 찾기 어렵습니다. 반면 면 팬티는 면 소재 부분만 분해되고 고무줄과 봉제선은 남아있어 묻었던 물체를 다시 찾아낼 수 있고 분해 정도를 눈으로 확인하기 용이합니다. 또한,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여 1,000명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현실적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Q2. 땅속에서 팬티가 가장 많이 분해되어 사라진 토양이 무조건 가장 건강한 토양이라고 볼 수 있나요?
A2. 그렇지는 않습니다. 팬티의 분해 속도에는 토양 생물의 활동성 외에도 온도와 수분, 영양분 함량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특히 숲이나 자연 상태의 생태계에서 팬티 분해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면 영양분이 과다 투입되어 자연적인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팬티가 많이 썩었다 = 무조건 건강한 땅'이라는 단순 공식은 성립하지 않으며, '팬티 지수'는 토양 생물들의 활동과 토양 상태를 직관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한 참고 지표로 해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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