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와 마찬가지로 구한말 정부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전공했으나 안상호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김익남의 삶을 다룬 글로, 그의 행보가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는 1898년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지케이의원의학교에서 공부한 뒤 일본 의사면허를 취득해 현지에서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김익남은 안상호보다 3년 앞서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선배입니다.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근대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의 교수 임명 요청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랐습니다.
김익남은 1899년 7월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의학교 교수로 취임하라는 요청을 받자 1900년 8월 귀국해 교수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4년 동안 의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총 32명의 한국인 근대 의사를 배출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던 시기에 근대 의학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의사 집단을 양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의학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김익남 후임 의학교 교수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안상호였습니다.
하지만 안상호는 1904년 10월 교수로 임명됐음에도 귀국을 거부했다가 석 달 뒤 해임됐습니다.
안상호는 1907년 의학교가 일제 통감부에 의해 대한의원에 강제 통합된 이후에야 귀국했습니다.
안상호가 친일 단체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친일 행적 의혹을 받는 것과 달리, 김익남은 일제와 거리를 두다가 불이익을 받은 정황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그는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자결한 정재홍 의사의 추모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았고,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통제하기 위해 발급했던 공식 의사 면허증인 '의술개업인허장'을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뛰어난 업적에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혔던 김익남의 생애는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취재 : 정다은, 영상편집 : 장유진, 디자인 : 육도현, 제작 : 디지털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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