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인지한 지 나흘 뒤, A 씨는 다른 산부인과에서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습니다. 앞서 산부인과 두 곳에 임신중지 수술을 문의했지만, 모두 거절당한 뒤였습니다. 당시 A 씨는 임신 36주 차였습니다. 그럼에도 A 씨가 세 번째 산부인과를 찾아 임신중지를 택한 이유, 경제적 여력이 없을 뿐더러 아기를 낳으면 키울 자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A 씨는 수술 과정 전반을 담은 브이로그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제목은 <총 수술비용 900만 원, 지옥 같던 120시간>입니다. 보건복지부는 A 씨의 영상을 보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수사기관은 조사를 거쳐 A 씨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죄명은 '살인죄'였습니다. A 씨가 임신중지 수술을 받음으로써 태아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임신중지를 택한 여성에게 살인죄가 적용된 건 A 씨가 처음이었습니다.
뒤집힌 판결…1심 '징역 3년' → 2심 '무죄'
핵심은 A 씨가 임신중지 수술 당시 '어디까지 알았는지'였습니다. 인지 범위를 통해 A 씨의 의도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태아가 사산될 줄 알았는지 2) 태아가 살아있는 상태로 나올 수 있다는 걸 알았는지에 따라 A 씨에게 적용되는 혐의와 그에 따른 양형은 모두 달라집니다. 만약 태아가 살아있는 상태로 출생한다는 걸 알고도 A 씨가 수술을 감행했다면 '살인 혐의'가 적용됩니다.
A 씨는 줄곧 "태아가 살아서 태어날 줄 몰랐다"고 주장했습니다. 임신중지 수술 당시, 태아가 사산된 상태로 나올 것이라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A 씨는 수술 전, 병원을 연결해 준 브로커에게 '태아가 사산되는지' 물어봤고, '사산된 상태로 나온다'는 취지의 답을 들었습니다.
1심 재판부 "A 씨, 태아 살해할 고의 있었다"
A 씨가 태아 사체 처리 동의서에 서명한 점도 근거로 들었습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살인의 고의는 살해 목적이나 의도가 있지 않아도, 자신의 행위로 인해 누군가 숨질 수 있다는 가능성 또는 위험을 인지하면 그 자체로 인정됩니다. 이에 따라 1심 재판부는 A 씨의 미필적 살인 고의를 인정한 것입니다.
2심 재판부 "A 씨, 태아 사산 사실 몰라…살해 고의 없었다"
재판부는 A 씨가 "태아는 사산된다'는 브로커의 발언이 의료진에게 문의하지도 않은 채 한 발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고 봤습니다. 브로커에게 '태아가 사산된다'고 들었으니, A 씨는 말 그대로 태아가 사산되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 A 씨가 태아 사체 처리 동의서에 서명한 건 태어난 사체에 대한 의료진의 살해를 용인한다는 것이 아니라, "태아의 사체를 위임하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보인다"고 봤습니다.
A 씨가 유튜브에 게시한 브이로그 영상도 판결의 근거가 됐습니다. 재판부는 "만약 제왕절개 방법으로 수술해 태아를 모체에서 배출 후 인위적으로 살해하는 방법이나 사정을 (A 씨가) 알고 있는 상태였다면, 유튜브 채널에 동영상을 게시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 행위로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유튜브 영상 역시 '태아가 사산되어 나온다고 알았다'는 A 씨의 주장을 뒷받침한 셈입니다.
'임신중지 결정=헌법상 자기결정권' 인정한 법원
김용석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신체와 임신 상태를 유지할지 결정할 권리는 헌법상 보장되는 일반적 인격권에서 파생되는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
선고 재판 말미에 재판부가 직접 밝힌 내용입니다. 재판부는 산모가 임신을 계속 유지할지 결정하는 권리는 '자기결정권'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여성이 임신을 유지할지, 아니면 중단할지 결정하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자기결정권'인 만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이 '산모 A 씨의 임신 종결 의사에서 비롯된 것을 양형에 참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A 씨가 임신중지 결정을 내리고 수술을 받은 것과, 살아있는 상태로 나온 태아를 살해한 의료진의 행위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 씨에게는 무죄가, 태아를 냉동고에 넣은 병원장과 집도의에게는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됐습니다.
"입법 공백 속에서 맞게 된 비극, 사회적 공론화의 계기 됐으면"
김명선 변호사 (A 씨 법률대리인)
이 사건이 산모 A 씨의 개인적인 형사 처벌을 무죄로 바꿨다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현행 법률이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계속되는 입법 공백 속에서 의료계와 산모 등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져서 이와 같은 비극을 맞게 됐는지, 이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A 씨의 법률대리인인 김명선 변호사가 2심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 말입니다. 김 변호사 이야기처럼, 7년 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대체 입법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임신중지는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닌 셈입니다. 임신 몇 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할 것인지, 임신중지를 위해서 산모는 어떤 약물/시술/수술을 선택할 수 있는지 등 사회적 합의와 기준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사회엔 수많은 위기임산부가 생겼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 고립돼 있었던 A 씨 역시 위기임산부 중 한 명이었습니다. 파트너 혹은 가족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고, 임신을 유지해 출산까지 감당할 상황이 안 됐습니다. 더군다나, 임신 사실 역시 늦게 인지했습니다. (A 씨는 월경을 3개월간 하지 않아 산부인과에 방문했지만 병원에서 '임신'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월경이 불규칙할 수 있다는 '다낭성 난소증후군' 진단을 받았습니다. 34~36주 차에 이르기 전까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부가 위기임산부에 대해 가명 처리를 한 뒤 출산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마련했지만, A 씨는 법률이 정한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A 씨가 임신을 인지한 시기는 2024년 6월 말, 해당 법은 2024년 7월 중순에서야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개인적 지원, 법과 제도의 지원 등 어떤 도움도 받지 못 한 A 씨는 결국 임신 36주 차에 임신중지를 택하기 이릅니다.
임신중지에 관한 안전한 정보가 제공됐다면 어땠을까
사회 제도의 부재로 인해 개인에게 비극이 발생했다면, 사회는 개인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7년간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 생긴 제도의 공백을 그저 개인의 '윤리적 결함'으로 메우려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여성의 임신중지는 여전히 비난 대상인 데다, '살인죄'로 처벌될 가능성이 여전합니다. 정보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출산을 하도록 내몰려선 안 됩니다. 지난달 28일 검찰은 A 씨에 대한 무죄 선고에 상고장을 제출했습니다. 이제는 대법원의 판단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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