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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산불'이 할퀸 마을, 이번에는 극한 폭우가 삼켰다

'괴물 산불'이 할퀸 마을, 이번에는 극한 폭우가 삼켰다
▲ 폭염 속 마늘 씻는 폭우피해 농민

[지난해에는 산불이 다 태워버리더니, 올해는 빗물이 다 쓸어갔어요.]

20일 오전 경북 안동시 일직면 귀미1리.

지난해 봄 대형 산불로 검게 타버린 산자락 아래에는 지난 18일 한밤중 마을을 뒤덮은 흙탕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산불 이재민들이 머물던 임시주택은 온데간데없이 흙범벅이 된 터만 남긴 채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지난 18∼19일 이곳에 쏟아진 폭우에 산불 이재민을 위해 설치된 일부 모듈러 주택이 침수되거나 물길에 쓸려 내려갔습니다.

시는 안전상의 이유로 지난 19일 오후 이곳에 남은 임시 주택을 모두 철거했습니다.

'괴물 산불'을 딛고 겨우 일어서려던 이재민들의 삶이 폭우 앞에서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임시 주택마저 잃은 이재민 15명은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전전하며 무더위 속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경북도는 이재민을 인근 권정생 생가 안에 있는 폐교를 활용한 임시 거처로 옮길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실제 입주까지는 한참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산불로 집을 잃고 임시주택에서 생활하다 이번에 수해까지 겪은 김 모(77) 할머니는 눈물부터 쏟아냈습니다.

그는 "19일 자정쯤 이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물이 다 찼다고 나오라'고 하더라"며 "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보니 이미 가슴 높이까지 물이 차올라 정신없이 빠져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휴대전화도 물에 잠겨 떠내려가 버렸고, 입고 나온 옷 한 벌 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비가 그치고 (임시 주택에) 다시 들어가 겨우 옷 몇 벌을 꺼내와서 빨았는데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며 "지난해 산불도 겪고 올해는 수해까지…. 또 갈 곳을 잃었다. 말도 못 하게 서럽다"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마을 임시주택에 살던 권 모(74) 할아버지는 생계가 막막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장 급한 건 이동 수단"이라며 "차도 오토바이도 다 물에 잠겨 폐차해야 한다. 농사도 지으러 못 가고, 복구도 못 한다. 움직일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산불 이재민을 위해 지은 임시 주택뿐 아니라 마을 내 기존 주택도 수해를 비껴가지는 못했습니다.

귀미1리 주민 권 모(65) 씨는 "수해가 난 날 온 마을 골목마다 빗물이 강물처럼 흘렀다"라며 "주민들이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겨우 마을을 다시 세워놨는데 또 이렇게 돼 너무 허탈하다"고 말했습니다.

곁에서 흙탕물을 쓸어내던 한 자원봉사자는 "이재민 대부분이 살림살이는 거의 다 버렸다고 보면 된다"며 "'이중 재난'에 다들 갈 곳도 없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한다"고 전했습니다.

귀미1리 마을 앞뒤로는 지난해 산불에 새까맣게 타버린 산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 아래로는 흙탕물이 들판과 마을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시커먼 산과 누런 흙탕물이 겹친 풍경은 '이중 재난'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귀미1리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의성군 단촌면 구계2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늘 주산지인 이 마을 냇가에서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진흙이 잔뜩 묻은 마늘 더미를 하나하나 씻어내고 있었습니다.

냇가 바로 옆에 들어선 산불 이재민을 위한 임시 주택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였습니다.

비록 이웃마을무ㅓ 안동에 설치됐던 산불 임시 주택처럼 빗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는 않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사용이 중단됐습니다.

의성군은 안전성 검토를 거쳐 철거 여부를 결정할 계획입니다.

임시 주택 옆 한 창고에서 바닥에 쌓인 흙더미를 치우던 주민 손 모(64) 씨는 허탈한 표정으로 "지난해 산불, 올해 물(난리)"라고ㅟ 짧게 말하며 탄식했습니다.

의성에서는 산불 임시주택에 거주하던 17세대 27명 등 모두 34세대 50명이 이번 폭우 피해 이재민으로 분류됐습니다.

이들은 의성종합운동장에서 기약 없는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의성군 관계자는 "이번 주에 많은 비가 더 내릴 수 있다고 해서 이재민들을 의성종합운동장으로 대피시켰다"며 "복구도 복구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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