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봄 저축'
평소에 '내게도 돌봄이 필요해'라고 늘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평생 동안 나는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지 모릅니다. 그런 '허상'에 기대고 있는 것이, 돌봄의 위기를 만들어 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삶에 접어들기 마련인데, 이를 외면하면서 돌봄의 역할을 그 본연의 가치보다 축소해서 바라본다는 겁니다.
여기 미래의 돌봄을 위해 지금의 돌봄을 적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그 시간을 포인트로 쌓고, 65세가 넘어 내가 돌봄이 필요해지면 그 포인트를 차감해 돌봄 봉사를 받는 겁니다. 돌봄은행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케어뱅크'가 이 서비스 이름입니다. 2015년 처음 대구와 청주에서 시범사업을 시작한 이 케어뱅크는 올해로 사업 11년째를 맞았습니다. 그 동안은 포인트 적립만 가능했고 직접 쓰는 건 유예돼 왔는데, 어제(1일)부터 포인트 차감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포인트를 마치 '적금' 드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으며 돌봄 봉사를 해온 봉사자 가운데, 65세 이상이면서 100포인트를 넘게 보유한 사람들은, 이제 그 포인트를 '출금'해 돌봄 봉사를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나도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어르신의 말
이종업 어르신이 말하는 '보람'은 케어뱅크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인 '타임뱅크'의 시작과도 정확히 그 뜻을 같이 합니다. 1980년 미국의 한 인권 변호사가 그 개념을 창안한 타임뱅크는, 소외계층도 당당한 사회 주체로서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낳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가 칸이라는 이 변호사는 44살을 맞았을 당시 심장질환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인권 변호사 일을 하다 하루아침에 돌봄을 받기만 하는 처지가 된 그는, 이전과는 달리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돼 간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같은 사회복지서비스의 수혜자가 세상에서 소외되지 않고 그 역시 사회복지서비스의 제공자로서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타임뱅크의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스템에 참여하는 그 누구라도, 스스로가 제공하는 돌봄 활동 1시간에 1돌봄포인트라는 가치를 동등하게 부여 받습니다. 노인 돌봄 봉사자가 다른 노인의 말벗이 되어주는 활동을 하는 것도, 청년 돌봄 봉사자가 다른 노인이 사는 주택 수리 보수를 해주는 것도 모두 1시간당 1돌봄포인트입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돌봄 서비스의 제공자와 수혜자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 그리고 돌봄의 수요와 공급 역시 자발성과 개방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는 게 이 타임뱅크의 특징입니다.
"돌봄을 환원하고 싶다"는 봉사자의 말
보건복지부가 사업 전반을 관리·감독하고,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사업 계획을 수립해 수행기관을 선정하고 돌봄 코디네이터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 케어뱅크 제도는, 돌봄 대상자 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적립과 기부를 받은 돌봄포인트가 100포인트를 넘거나 돌봄 코디네이터와 사회복지사 등이 돌봄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사람, 그리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나 65세 미만 중 노인성 질병을 가진 사람들 중에 국가가 심사를 거쳐 일상생활 등을 혼자 하기 어렵다고 판정한 이들이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습니다. 재가급여, 시설급여 등의 형태로 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 케어뱅크 제도는 이런 판정을 받지 '않은' 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공적 돌봄이 미치지 않는 영역을 메우는 효과를 가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그런 케어뱅크의 특성을 두고 "관계적 복지"라고 강조하면서 "비공식적인 자원으로 (공적) 돌봄 서비스의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이 나오지 않은 노인이라고 돌봄의 필요성에서 모두 자유로운 건 아닐 겁니다. 공적 돌봄 체계에서는 벗어나 있는 이들이기에 돌봄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민간 시장에서 돌봄 서비스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타임뱅크 시스템을 가리켜, 시민들이 서비스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공동으로 참여하는 코프로덕션(co-production)의 일종으로 지칭하는 이들은, 비시장경제 기능을 복원하고 시장경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타임뱅크가 노인 돌봄의 영역에서, 고령화 속도에 비해 돌봄의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에서 떠오르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싱가포르나 타이완, 태국 등에서도 우리나라 케어뱅크와 같은 타임뱅크 제도가 도입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돌봄 대상자는 많은데 봉사자가 없다면?
하지만 이 케어뱅크 시스템으로 모든 노인 돌봄의 빈틈이 메워지는 건 아닐 겁니다. 단적으로 숫자만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2025년 말 기준, 전국 돌봄 대상자는 5만 923명입니다. 돌봄 봉사자는 5만 5천389명입니다. 봉사자 숫자가 대상자 숫자보다 더 많아, 돌봄을 희망하는 이들이 모두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역별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남의 경우에는 돌봄 봉사자가 1천896명, 돌봄 대상자가 5천448명입니다. 대상자가 3배 가까이 많습니다. 이런 숫자의 불균형이 봉사자와 대상자의 연결을 어렵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한국사회복지협의회 관계자는 "그럴 수도 있다"면서 "아무래도 봉사자는 도심에 있을 확률이 높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농촌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 "봉사자 1명이 대상자 여러 명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이럴 경우 돌봄 서비스의 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지역별 불균형 말고도, 서비스 종류의 불균형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 케어뱅크는 돌봄 봉사자가 처음 시스템에 등록을 하면서 자신이 제공 가능한 돌봄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돌봄 대상자 역시 등록을 하면서 자신이 제공 받고 싶은 돌봄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전달합니다. 지역별 서비스 수행기관(지역 노인종합복지관 등)이, 이렇게 등록된 봉사자와 대상자의 제공 및 희망 서비스를 살펴보고 그것이 맞아 떨어지는 서로를 연결해 줍니다. 예를 들어 돌봄 봉사자 100명, 돌봄 대상자 100명이 같은 지역에서 케어뱅크 프로그램 참여를 희망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돌봄 봉사자 90명은 말벗 봉사가 가능하다고 했고, 돌봄 대상자 90명은 취사 등 가사 지원을 원한다고 했다면, 서로가 원하는 만큼 돌봄 활동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모든 활동이 1시간에 1돌봄포인트인 케어뱅크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고된 돌봄 활동을 희망하는 돌봄 봉사자의 수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1시간이 1시간으로' 무차별적으로 교환돼야 한다는 이 특성이 타임뱅크의 적용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옵니다. 호혜 교환의 범위를 넓히는 데 이 핵심 특성이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선, 이 제도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자원봉사 인프라 격차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지역 간 돌봄 서비스 인프라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활동을 조직화하는 돌봄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돌봄 활동의 내용을 너무 크게 지정하기보다는 잘게 쪼개어 사람들이 활동에 참여하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정부가 이런 관계에 기반한 돌봄의 중재자로서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듯한 돌봄 수혜 정책을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제안과도, 이런 석 교수의 의견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또 '1시간에 1돌봄포인트'가 주는 한계를 보완할 여러 아이디어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먼저 일본에서는 '후레아이 킷푸(서로 돕기 쿠폰)'라는 타임뱅크 사업이 있습니다. 그 개념의 출발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90년대 들어 일본 내에서 자원봉사의 확대와 함께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후레아이 킷푸'는 현금과 결합해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타임뱅크의 대원칙과는 달리, 신체 활동을 돕는 돌봄은 다른 형태의 돌봄 활동보다 그 가치가 높게 매겨집니다. 특정한 돌봄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1시간에 1포인트가 아니라 더 많은 포인트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니, 그 특정한(아마도 더 고될) 돌봄 활동에의 참여를 독려하는 효과를 낼 겁니다. 한편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봉사 활동의 종류를 분류해 두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돌봄 활동은 돌봄 활동끼리, 법률자문이나 교육 등은 또 그렇게 카테고리를 묶어서 그 카테고리 안에서 봉사하고 포인트를 쌓고 차감하는 것"이 어떠냐는 건데, 시장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타임뱅크의 정신을 나눌 수 있는 방법론적 접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부연했습니다. 이렇게 비시장경제와 시장경제를 혼합하는 시도로써, 돌봄 활동을 제공하면서 얻은 1돌봄포인트를 타임뱅크 내에서가 아닌 외부 시장에서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년 돌봄 봉사자가 돌봄 활동 1시간을 제공하고 받은 1돌봄포인트를, 사설 학원에서의 1시간 수강권과 바꿀 수 있게 해주자는 겁니다. 젊은 층의 타임뱅크 활동 참여에 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런 아이디어에도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돌봄?' 진짜 돌아오려면
* 이 기사를 쓰는 데에 참고한 글
-김정훈·이다겸. 2018. 지역공동체경제 활성화를 위한 전략 연구 : 타임뱅크를 중심으로. 경기연구원.
-김자옥·양혜란. 2019. 타임뱅크의 현실적 적용방안과 효율적 운영관리체계 개발에 관한 연구. 서울시자원봉사센터.
-조기현·홍종현. 2024. 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한겨레출판.
-David Boyle. 2011. More than money : Platforms for exchange and reciprocity in public services. NE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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