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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한 임산부 피의자, 그리고 '관행'이라는 답변 [취재파일]

임신 중이던 A 씨는 지난해 사기 혐의로 고소돼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대기업과의 계약 이행과 관련해 중요 사실관계를 알리지 않고 투자금을 끌어모았다는 혐의였습니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30일과 31일, 올해 1월 22일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A 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했습니다. A 씨는 세 번째 경찰 조사 다음 날 복통을 겪고 유산했습니다.
 

"피의자 조사 후 유산"…A 씨, 인권위에 진정

A 씨는 "경찰 조사 시작 전 임신 사실을 수사관에게 알렸는데도 심야 조사를 강행했고, 임산부인 피의자의 건강과 안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유산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지난 3월 진정을 냈습니다.

임산부·임신부 (사진=연합뉴스)

인권위 결정문에 따르면 A 씨는 각각 1차 조사에서 오전 9시 40분부터 밤 11시 14분까지 총 13시간 34분, 2차 조사에서는 오전 10시부터 밤 10시 35분까지 12시간 35분, 3차 조사에서 오전 9시 30분부터 밤 11시 20분까지 13시간 50분 조사를 받았습니다. 세 차례 모두 오전부터 시작해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휴식 시간을 제외한 실제 조사 시간이 8~11시간에 달했습니다.

피의자 심야 조사는 피의자가 재출석이 곤란한 구체적 사유를 들어 먼저 요청해야 하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 수사관은 "심야 조사 콜?"이라고 발언하며 A 씨에게 심야 조사를 먼저 요청한 사실이 인권위 조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마지못해 '연내 조사 희망', '신속 조사 위해 요청함'이라는 사유가 담긴 요청서를 제출했다는 게 A 씨 측 주장입니다.
 

경찰 "피의자가 동의하면 심야 조사 이뤄지는 게 관행"

경찰은 조사량이 방대해 심야 조사가 불가피했고, A 씨가 동의해 '심야조사요청서'를 제출했으므로 조사를 강행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습니다. 경찰은 또 A 씨가 심야조사요청서를 직접 작성했으며, 강제로 조사를 진행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서울경찰청 소속 B 경감과 C 경위가 '적법절차의 원칙과 수사준칙을 위반'하여 A 씨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경찰청 로고와 간판 (사진=연합뉴스)

인권위는 A 씨가 경찰 조사 전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피의자 신문조서에 A 씨의 임신 사실이 기재되지 않은 점, 무엇보다 심야조사요청서가 구체적 사유 없이 형식적으로 작성된 점이 문제라고 봤습니다. 특히 2차 조사의 경우 심야조사요청서조차 작성되지 않은 사실이 명백하며, 이는 수사준칙 제 21조를 정면으로 위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인권위는 경찰이 관행을 이유로 피의자의 신체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조사를 이어가는 것은 '강압 수사 관행을 근절하고 허위 자백 등을 방지하고자 하는 수사준칙을 형해화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았습니다.
 

인권위 "경찰, 임산부 피의자에 대한 보호조치 미흡"

물론, 임산부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피의자에 대한 심야 조사가 일률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권위 역시 이번 사건에서 심야 조사와 유산 사이의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인권위는 경찰이 관행을 이유로 심야 조사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장시간 조사를 진행하고, 조사 일정을 쪼개 심야 장시간 조사를 피하는 등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특히 수사관이 임신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피의자로부터 형식적인 동의만 받았다면 이는 적법한 심야 조사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인권위는 경찰청에 심야조사요청서에 재출석이 어려운 구체적 사유를 기재하도록 하는 방안과 임신 등 건강 상태를 필수적으로 기록하도록 하는 제도 개선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경찰 심야 조사 관행에 제동…17년 전에도 임신 7주 차 여성 유산해 인권위 진정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가 경찰의 심야 조사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22년에도 인권위는 주거 침입 혐의 피의자를 자정 이후까지 조사한 경찰에 대해 직무교육을 권고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재출석 일정을 잡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인권위는 수사준칙이 정한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수면권과 휴식권 침해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임산부 보호 문제가 제기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9년에는 살인사건 피의자의 친척 집을 경찰이 새벽 시간대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임신 7주 차 여성이 유산했다고 주장하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인권위는 심야 시간대 다수 경찰관이 동원된 압수수색이 위압적으로 이뤄졌고, 당사자들의 동의와 협력을 얻는 데 소홀했다고 판단해 경찰에 주의 조치를 권고했지만, 경찰은 적법한 직무수행이었다며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인이나 유력 인사의 건강 앞에 경찰의 수사 관행은 종종 유연하고 정중하게 작동해 왔습니다. 조사 도중 허리 통증을 이유로 조기에 귀가 조치하거나 일정을 재조정해 주는 식입니다. 임신 사실을 수사관에게 알린 피의자에게는 왜 같은 수준의 고려가 적용되지 않았을까. 수사기관의 배려와 재량은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으로 적용되고 있는가. 이번 사건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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