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를 단순한 행정 실패로 볼 수는 없습니다. 투표용지는 선거에 필요한 비품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반드시 제공해야 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투표용지가 없어 투표하지 못했다면 불편을 겪은 것이 아니라 기본권을 행사할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초등학교 회장 선거에도 이런 일은 없을 것"
투표함이 개표소로 옮겨진 이후부터 시민들은 올림픽공원에 모였습니다. 특히 낮 시간에는 20·30대 참가자들이 태극기나 성조기, 정당 구호를 자제하고 "재선거"와 "참정권 보장"만 외치자며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저녁 이후에는 일부 극우 유튜버와 보수단체 인사들이 합류해 "부정선거", "선관위 해체" 등의 구호를 외쳤지만 주류를 이루진 못했습니다. 따라서 주말 시위를 투표권 침해에 항의하러 나온 다수의 일반 시민과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온 소수의 정치 집단 주장으로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가 용지 사용 50곳, 투표 중단ᆞ대기 22곳
선관위는 사전투표율이 높아지고 선거가 끝난 뒤 남는 투표용지가 많다는 이유로 선거인 수의 약 50% 수준을 기준으로 본투표 용지를 인쇄·배분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이한 예측으로 전체 물량도 빡빡했지만 '어느 투표소에 몇 명이 몰릴 것인가' 대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송파구 전체로는 남는 용지가 4만 장 있었지만, 정작 부족한 투표소에 신속하게 옮길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상상황시 명확한 매뉴얼과 법적 근거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부족 보고가 접수된 뒤 용지를 확보하고 운송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고, 추가 물량도 현장 대기 인원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투표가 종료된 오후 6시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계속됐지만, 방송3사 출구조사가 발표됐고 다른 지역에서는 개표가 시작됐습니다. 뒤늦게 투표한 유권자가 외부 정보에 노출됐는지, 투표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이 몇 명인지조차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선관위의 관리 실패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22년 대통령선거 코로나19 확진자 사전투표에서는 유권자가 기표한 투표지를 소쿠리와 종이상자, 쇼핑백 등에 담아 운반하는 이른바 '소쿠리 투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2025년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때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용지를 받은 채 투표소 밖으로 나갔다가 식사를 마친 뒤 돌아와 기표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사달이 날 때마다 선관위는 혁신위원회, 신뢰회복특별위원회 등 각종 방안을 제시했지만 별무소용이었습니다. 선관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63년 헌법상 독립기구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뒤 국정감사 정도말고는 제대로 된 외부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아왔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9명 가운데 선관위원장 등 8명이 비상근이어서 조직적 해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느슨한 분위기 속에 본연의 업무인 주요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이 대통령 "주권감수성 부족 반성"..장동혁 대표 "전국 재선거" 주장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도 점점 강경해졌습니다. 이 대통령은 선거 다음날인 4일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7일에는 "이번 사태는 참정권과 국민주권의 근간을 훼손한 중대한 사안"이라고 규정하며 국회에 신속한 국정조사를 요청하고, 검찰과 경찰의 합동수사, 선관위의 근본적인 제도 개선을 주문했습니다. 오늘(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는 "투표권 행사를 정부가 이렇게 대책없이 속된 말로 어영부영 대충해서 주권 행사를 못하게 했다는 건 표의 숫자나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지적하는 청년들이 참으로 귀하고 존경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도 그 생각을 못했다. 주권감수성 부족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은 반성이 들더라"고 평가했습니다. 사태 초기부터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으로 들렸습니다.
국민의힘 역시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했습니다. 국조 위원장은 야당으로 해야한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당 차원의 컨센서스와는 별도로 장동혁 대표가 전국 재선거를 하자며 급발진을 했습니다. 어제 국회 기자회견에서 재선거를 요구하고 나선데 이어 오늘 최고위원회의에서도 "국민의 요구는 재선거다. 국정조사보다 특검이 우선이고 특검보다 재선거가 먼저다"고 공세 수위를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정치권이 재선거를 외친다고 곧바로 재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 무효 여부는 주장의 크기가 아니라 법률이 정한 절차와 증거에 따라 판단됩니다.
재선거는 어떻게 결정되나..2001년 구로을 사례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의 수, 실제 투표하지 못하고 돌아간 유권자의 규모, 해당 지역의 후보자 간 표 차이, 투표 종료 뒤 외부 정보에 노출된 상태에서 이뤄진 투표가 결과에 미친 영향 등을 법적으로 따져야 합니다.
대표적인 국내 재선거 사례는 2000년 4월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구로을 선거입니다. 대법원은 2001년 7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계열사와 임직원을 조직적으로 선거운동에 동원한 행위가 선거의 공정을 심각하게 훼손했고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며 선거 전체를 무효로 판단했습니다. 이후 재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재선거 사유가 되려면 선관위의 관리 실패가 어느 정도였고 실제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법원이 별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베를린은 왜 전체 선거를 다시 치렀나
베를린 헌법재판소는 2022년 11월, 오류의 범위와 심각성이 광범위해 일부 지역만 다시 투표해서는 선거의 정당성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베를린 주의회와 12개 자치구 의회 선거 전체가 2023년 2월 다시 실시됐습니다.
반면 같은 날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별도의 연방헌법재판소 판단을 거쳐 문제가 확인된 455개 투표구에서만 2024년 2월 부분 재선거가 실시됐습니다. 같은 행정 실패가 있었더라도 선거의 종류와 오류가 결과에 미친 범위에 따라 전체 재선거와 부분 재선거가 달리 결정된 것입니다.
"국민 참정권 침해" 목소리 자체에 귀 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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