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이 일상이 된 도시
대피소의 아이들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레바논 남부에서 피란 온 다섯 살 라하프는 "폭격이 너무 심했어요" 라고 말했다.
열 살 아담은 더 구체적이었다.
"상황이 안 좋고 무서웠어요. 우리를 폭격하려는 거였어요. 새벽 3시까지 버티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길 위에서도 공습이 멈추지 않았어요. 온 세상이 불타는 것 같았어요."
"틈이 하나 보였어요"
열 두 살 자흐라는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렸다.
"틈이 하나 보였어요. 그래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와줄 수 있게요. 사람들이 와서 저를 꺼내줬어요."
자흐라는 그나마 가족이 모두 살아남았다. 하지만 자흐라가 말한 '지금의 삶'은 평범과 거리가 멀다.
"지금처럼 사는 건 싫어요. 비행기 소리와 공습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게 제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권리예요."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만나지 못한다. 자흐라는 "아이들 대부분이 병원에 있다" 고 했다.
매일 교실 하나가 비어간다
유니세프 레바논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크리스토프 불리에락은 S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서 화상을 입은 아이들, 팔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아이들을 봤습니다. 의료진은 살아남은 아이에게 부모나 형제자매가 숨졌다고 알려야 합니다."
매일 교실 하나의 학생 수만큼 아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있다. 레바논 전체 사망자는 이미 1천 명을 넘겼다. 의료 인력 40명이 숨졌고, 119명이 다쳤다. 구급대원 30명 이상도 목숨을 잃었다.
대피소는 10만, 피란민은 100만
월드비전 레바논 디렉터 하이디 디드리히는 대피소 밖의 현실을 전했다.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피란민 대다수는 대피소 밖에 있습니다. 텐트에서, 차 안에서, 야외에서 잠을 잡니다."
월드비전은 3월 1일 확전 직후부터 긴급 팀을 투입해 약 400개 대피소에서 13만 2천 명을 지원하고 있다. 그중 아동이 3만 7천 명이다. 베이루트와 마운트레바논 지역 대피소 피란민의 70%를 월드비전이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대피소 밖에 있는 대다수에게는 손이 닿지 않는다.
침대 대신 매트리스가 깔린 교실
유니세프 레바논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크리스토프와 인터뷰하기 전날 밤, 베이루트에서만 7번의 폭발이 있었다. 대피소가 된 학교에서 아이들은 매일 밤 그 소리를 듣는다. 크리스토프는 "학교에 가는 건 배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정감, 그리고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곳이기도 합니다" 라고 했다. 그 거점이 사라졌다.
멈춘 건 수업만이 아니다. 유니세프는 이동진료소 38대를 가동해 만성질환 아동과 임산부를 돌보고 있다. 임산부 1만 1천600명이 피해를 입었고, 4천 명이 3개월 내 출산을 앞두고 있다. 피란 도중 길 위에서 출산한 사례도 보고됐다.
코로나, 폭발, 전쟁, 또 전쟁
월드비전 레바논 디렉터 하이디의 직원 중에는 레바논 내전(1975~1990) 시절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있다. 폭격 속에 자란 아이들이 부모가 됐고, 지금 자기 아이들이 같은 폭격을 듣고 있다. 확전이 시작되자 이들이 하이디에게 말했다.
"우리는 단지 평화를 원합니다. 나는 분쟁 속에 자랐어요. 내 아이들은 내가 갖지 못한 기회를 갖고 자라길 원합니다."
하이디는 "트라우마를 다루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은 채 아이에게 평생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유니세프와 월드비전 모두 대피소에서 심리사회적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놀이, 음악, 그림, 축구.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돈도, 길도 끊겼다
하이디는 이 위기 전에도 레바논에서 30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했고, 140만 아동이 고위험군이었다고 했다. 전쟁이 터지면서 그 위에 100만 명의 이재민이 쌓였다. 크리스토프는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요구했다.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단, 민간인과 민간 시설 보호, 그리고 안전하고 신속한 인도적 접근 보장.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장난감 갖고 놀고, 내 침대에서 자고 싶어요."
다섯 살 라하프가 바라는 건 그뿐이다. 하지만 아이의 집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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