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 10분
임 씨의 주방에는 이렇게 '손질'된 우유팩과 두유팩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임 씨는 이 팩들을 들고 아파트 분리수거장이 아닌 마을협동조합을 찾아간다. 때로는 택배 상자에 담아 재활용 업체로 보내기도 한다. 쓰레기를 버리는 데 돈과 시간을 쓴다.
"종이로 그냥 배출하면 다 버려진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예전엔 사람들이 우유팩 안에 쓰레기나 기저귀를 막 넣어 버리는 걸 보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죠."
처음엔 혼자였지만 지금은 동네 주민들과 함께한다. 5~6년 전 혼자 시작한 가위질은 이제 이웃들로 번졌다. 임 씨는 현재 탄소중립마을 '너머'의 이사로 활동하며, 개인의 실천을 넘어 마을 단위로 자원순환 운동을 이끌고 있다.
"제발 수거함 좀" vs "민원이 많아서"
"냄새가 난다, 벌레가 생긴다. 이런 주민 민원이었대요. 의지의 문제인지, 행정의 한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더 큰 문제는 멸균팩이다. 두유팩처럼 알루미늄 코팅이 된 멸균팩은 행정복지센터에서도 교환해 주지 않는다. 임 씨는 이것만 따로 모아 택배로 재활용 업체에 보낸다.
"내 집 앞에 버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참여율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버릴 곳도 없고, 일부러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야 되고. 직장인분들은 참여하기도 어렵고, 주말에는 버릴 수 없고."
수거함 하나가 바꾼 풍경
"그전에는 상자 버리는 데, 종이 버리는 데 거기다 그냥 버렸었어요. 근데 이제 수거함이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헹궈서 넣게 돼요. 번거로울 거 없어요."
주민 함영자 씨의 말이다. 종이팩을 따로 배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숲과나눔의 허그림 캠페이너는 "종이팩은 재활용이 가능한데 버려지고 있던 자원 중 하나"라며 "서울 서초구, 노원구, 도봉구 등 10만 세대 공동주택에 수거함을 설치했고, 전주시와 시흥시에서도 시범사업을 진행해 지자체가 조례를 만드는 것까지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수거함 하나가 주민의 행동을 바꿨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을 갖춘 곳은 전국에서 극히 일부다.
섞이면 쓰레기, 나누면 '4배'
이 코팅 때문에 재활용 공정이 일반 폐지와 완전히 다르다. 폐지는 물에 풀어 녹이지만, 종이팩은 코팅을 벗겨내는 별도의 '해리' 과정이 필수다. 섞이면 재활용 공장에서 '이물질' 취급을 받아 폐기물로 분류된다.
제대로 회수만 되면 귀한 대접을 받는다. 종이팩의 원료는 100% 수입에 의존하는 최고급 천연 펄프다.
버려진 우유팩을 펄프로 되살리는 최종 재활용 기업, 한솔제지의 설명은 더 구체적이다. 임경륜 한솔제지 팀장은 "일반 고지(폐지)보다는 펄프로 활용되는 우유팩이 4배 정도의 높은 부가가치가 있는 원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14% vs 86%, 포장재 중 꼴찌
왜 이렇게 낮을까. 1차적인 원인은 '전용 수거함'이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종이팩 수거함이 없다 보니 시민들은 폐지함에 신문지, 상자와 함께 섞어 버린다.
세종시에서 재활용 선별장을 운영하는 주신통상 이동규 대표는 "일반 폐지로 종이팩이 섞여서 들어오면 선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활용을 할 수가 없다"며 "분리를 해서 배출을 해 주셔야만 일반 팩과 멸균팩을 분류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구조"라고 호소했다.
기계는 4대뿐…'제2의 페트병 사태' 우려
현재 전국 공공 선별장 중 우유팩과 멸균팩을 자동으로 분류할 수 있는 광학 선별기를 갖춘 곳은 단 4곳뿐이다. 수거함이 생겨서 종이팩이 따로 들어와도, 이를 멸균팩과 살균팩으로 나눠 처리할 인프라가 없는 셈이다.
우리는 이미 실패를 경험했다. 2020년 '투명 페트병 분리배출 의무화' 당시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라벨을 떼고 따로 모았지만, 선별장에 별도 처리 라인이 없어 다시 섞이는 일이 반복되며 제도는 표류했다.
시민단체는 '준비 없는 시행'을 경계한다. 숲과나눔의 허그림 캠페이너는 "올해 환경부가 분리수거 지침을 개정해서 전국에 종이팩 수거함이 놓일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고 했다"면서도 "실행 계획은 각 지자체에서 진행할 텐데, 일시에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의무화는 혼란만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벨기에 84%, 한국 14%
차이는 시스템에 있다. 유럽은 종이팩 회수 체계가 일찍부터 정착됐고, 멸균팩에서 분리한 폴리에틸렌과 알루미늄까지 건축자재로 재활용하는 기술이 상용화돼 있다. 일본은 슈퍼마켓이 수거 거점 역할을 수행하며, 시민들이 장을 보러 갈 때 팩을 반납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알루미늄 빼는 기업, 숙제 받아든 정부
먼저 재활용 효율을 떨어뜨리는 '알루미늄' 문제다. 멸균팩 안쪽의 알루미늄 코팅은 보존력을 높이지만, 재활용 공정에서는 방해꾼이다. 정부의 정책적 유도에 발맞춰 서울우유, 매일유업, 남양유업 등 주요 유업체들은 알루미늄을 제거한 '알루미늄 프리' 멸균팩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정부에게 남은 과제는 인프라다. 기후부는 아파트 분리배출 의무화로 수거 물량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현재 4곳에 불과한 광학 선별기를 확충할 방침이다.
기후부 맹학균 자원재활용과장은 "단순히 분리배출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는 재활용 체계가 안 돌아간다"며 "제조사 재질 개선, 분리배출, 선별 인프라 확충, 재활용 제지사 능력 확충까지 전반적인 재활용 체계를 갖추기 위해 각 주체들과 조율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 중 전국 아파트에 종이팩 수거함 설치를 의무화할 방침이다.
시민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려면
씻고, 펼치고, 말리는 시민들의 번거로운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정부가 그린 청사진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제2의 페트병 사태를 막을 수 있을지,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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