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상황이 요즘 우리 공연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엄연히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연극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아니, 부르지 않는다. 대신 뮤지컬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표를 팔고 관객을 만난다. 이런 공연들은 노래가 서사를 이끄는 뮤지컬의 문법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가격만큼은 대형 뮤지컬 작품과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문제는 최근 8뉴스 리포트를 통해 한 차례 짚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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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확인한 사례들은 공연 장르 분류를 둘러싼 혼란이 단순한 홍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공연 시장 구조 전반과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취재파일에서는 당시 리포트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맥락과 구조적 배경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노래 없는데 뮤지컬? 혼란스러운 현장
이안 감독의 영화를 무대로 옮긴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는 한국에서 뮤지컬로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뮤지컬 넘버, 즉 노래가 등장하지 않는다. 연극과 뮤지컬 부문을 나눠 시상하는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에서 모두 연극 부문 상을 받았다. 연극이 맞다. 한국 공연 제작사는 이 작품이 뮤지컬도 연극도 아닌 새로운 유형의 공연이라며, '공연' 혹은 '라이브 온 스테이지' 등으로 표기해 달라고 보도자료에 썼다. 개막 기자회견에서도 이 공연은 새로운 장르인 '라이브 온 스테이지(Live on Stage)'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이브 온 스테이지'는 과연 장르일까. '무대에서 라이브로 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게 따지면 '라이브 온 스테이지'가 아닌 공연이 과연 있을까. 연극이라고 밝히기는 싫고, 그렇다고 뮤지컬이라고 하기는 궁색하니 동원된 수사에 가깝다.
최근 한국에서 개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오리지널 투어 공연도 마찬가지다. 이 공연은 일본 공연 제작사 토호가 세계적인 연출가 존 케어드 등 영국의 창작진과 협업해 만든 연극이다. 일본 공연뿐 아니라 런던 공연에서도 일본 배우들이 일본어로 공연해 큰 찬사를 받았다. 오케스트라 라이브 반주가 전반에 흐르는 등 음악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배우가 노래로 서사를 이끌지 않기에 연극으로 분류된다.
토호는 이 작품을 '연극'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연극과 뮤지컬을 구분해 시상하는 왓츠온스테이지 어워즈에서 신작 연극상을 받았다. 내한 공연을 앞두고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연출가 존 케어드 역시 "노래가 없으니 뮤지컬보다는 연극에 가깝다. 이걸 뮤지컬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원 제작사도 연출가도 연극이라고 밝힌 이 작품을 한국에서는 뮤지컬로 분류해 판매하고 있다.
관객이 마스크를 쓰고 건물 안의 여러 공간을 이동하며 관람하는 대표적인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 모어' 역시 뮤지컬로 표를 판다. '슬립 노 모어'는 기존의 전통적인 연극과는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이를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노래는커녕 배우의 대사조차 없는 무언극이자 피지컬 시어터(Physical Theater)에 가깝다. 해외에서도 주요 연극 시상식에서 수상했고, 포스트드라마 연극(Postdramatic Theater) 혹은 이머시브 공연(Immersive Performance)의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제작사의 선택 뒤에 숨은 '가격 저항'의 공포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우리나라에서는 '비싼 연극'이라는 개념이 아직 낯설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요즘 대극장 작품의 경우 최고가 15만 원 이상이 일반적이고, 2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등장했다. 반면 연극은 다르다. 최근 연극계의 대형 화제작이었던 '벚꽃동산'이나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10만 원대 초반의 가격을 책정했는데, 연극이 왜 이렇게 비싸냐는 반응이 나왔다.
현재 공연 중인 '라이프 오브 파이'는 '한국어 라이선스 연극'이며, '레플리카(Replica, 복제) 프로덕션'이다. 한국어로 번역해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점을 제외하면 해외 프로덕션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다. 제작 구조만 놓고 보면 '오페라의 유령' 같은 한국어 라이선스 뮤지컬과 크게 다르지 않다. 티켓 최고가는 16만 원으로,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과 비슷한 수준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 오리지널 캐스트의 내한 공연으로 최고가 19만 원이며, '슬립 노 모어'는 다양한 패키지로 인해 19만 원에서 30만 원대까지 가격이 치솟는다. 모두 대극장 뮤지컬에 맞먹거나 그 이상으로 제작비가 투입된 대형 공연들이다.
해외에서는 연극 장르에서도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대형 공연이 적지 않으며, 가격 또한 대극장 뮤지컬과 대등하거나 더 비싼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관객들은 아직 이러한 연극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형 연극을 들여오는 기획사들은 더 많은 관객의 관심을 끌고 가격 저항을 낮추기 위해 '뮤지컬'이라는 이름표를 선택한다. 보도자료나 홍보물에서는 '연극'이라는 장르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기존 공연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공연 예매 사이트에는 뮤지컬로 등록해 판매한다.
고착화되는 고정관념: 뮤지컬=스펙터클, 연극=영세함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 관객 불만이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은 아니지만, 뮤지컬인 줄 알고 갔다가 아니라서 당황했다는 후기는 꾸준히 나온다. 특히 '라이프 오브 파이'에 출연하는 박강현은 가창력으로 유명한 뮤지컬 배우이기에, 뮤지컬 넘버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이 적지 않다. 일부 관객은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장르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마케팅은 결국 관객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무엇보다 이러한 관행은 장기적으로 두 장르 모두의 가능성을 위축시킨다. 고희경 원장은 "뮤지컬 입장에서는 '뮤지컬=스펙터클'이라는 인식이 고착화되는 것이 문제이고, 연극 입장에서는 '연극=대중성 없는 가난한 예술'이라는 고정관념 역시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뮤지컬의 본질은 화려한 볼거리나 스펙터클이 아니다. 물론 대형 뮤지컬 가운데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작품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소규모 뮤지컬도 분명 존재한다. 연극 역시 본질적으로 대중성이 없거나 영세한 예술이 아니다. 연극에도 스펙터클이 있을 수 있고,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 시장은 '비싸고 화려하면 무조건 뮤지컬'이라는 기괴한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는 왜곡된 인식을 강화해 연극 장르가 대중성과 시장성을 확장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은 대형 연극들이 한국에 소개되는 지금이야말로, 연극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고 연극 시장을 넓힐 기회로 삼아야 한다. '뮤지컬 티켓은 비싸고 연극 티켓은 싸다'는 인식은 결코 당연한 명제가 아니다. 팬데믹 시기 추진됐다가 무산된 '워호스'나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같은 대형 연극 역시 앞으로 한국에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혼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연극이라고 부르는 작품을 한국에서만 뮤지컬이라 부르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수수료 차등화와 통계 왜곡의 부작용
예매 사이트의 장르 분류 오류는 공연예술통합전산망 KOPIS의 데이터 왜곡으로 이어진다. KOPIS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운영하는 국가 공인 공연 통계 시스템으로, 공연 예매 사이트의 데이터를 통합해 시장 통계를 산출한다. 그런데 예매율 상위를 차지하는 대형 연극들이 뮤지컬로 분류되면서 뮤지컬은 과대계상되고, 연극은 과소계상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KOPIS 통계는 공연 지원과 진흥 정책, 학술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공식 데이터다. 오류가 방치될 경우, 왜곡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책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는다. 해외 시장과 비교할 때도 기준이 어긋나는 문제가 생긴다.
현재 KOPIS는 예매 사이트에서 뮤지컬로 판매되는 이은결 마술 공연이나 태양의서커스 공연을 '마술/서커스' 장르로 재분류해 집계한다. 모든 공연을 일일이 확인해 수정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큰 대형 공연만큼은 기계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하기보다는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예매 사이트 역시 공연 카테고리 체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은결 마술 공연이나 태양의 서커스 공연도 마땅한 분류 기준이 없어 뮤지컬로 판매되고 있다. 현재의 구조는 비싼 공연은 모두 '뮤지컬'이라는 하나의 바구니에 억지로 쑤셔 넣는 셈이다. 객석 규모별 분류를 도입하거나, 기존 장르 구분에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담을 별도 카테고리를 신설하는 등, 변화하는 공연 시장을 반영한 정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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