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나온 미국 재무부의 보도자료에는 의외로 원화 환율 문제가 언급됐다. 스콧 베선트 장관이 지난 12일 방미한 한국의 구윤철 경제부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최근의 원화가치 하락에 대해 "한국의 강력한 펀더멘털(경제 기초 여건)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외환시장에서의 과도한 변동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산업 분야에서의 한국의 강력한 경제성과가 한국을 아시아에서 미국의 핵심적인 파트너로 만든다"고 덧붙였다.
미국 재무장관이 사실상 외환시장에 원화 약세에 대한 강한 '구두개입'을 한 셈이어서 상당히 이례적이다. 앞서 미국이 환율을 언급할 때는 무역상대국의 통화약세로 미국산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적자를 볼 때 '환율조작국'지정도 하고 압박 목적으로 엄포를 놓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번엔 한국의 경제수장을 만나 통화약세를 걱정해주는 모양새여서 성격이 달라 보인다. 구 부총리는 12일에 베선트 장관과 회담했고 귀국했는데, 이틀 뒤에 보도자료를 낸 것도 눈길을 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베선트 장관의 언급에 대해 "미국 재무부가 이례적으로 한국 원화에 대한 직접 신호를 보냈다"면서 "보기 드문 공개지원(rare support)"이라고 표현했다.
사실상 한·미·일 동반 구두개입..복잡한 속내는?
어찌됐든 미국의 원화환율 구두개입은 시장에 위력이 있었다. 오늘(15일) 서울 외환시장이 열리자 원-달러 환율은 12원 넘게 급락하면서 1460원대에 개장했다. 오후엔 다시 오르면서 1470원대로 마감했다. 다만, 이번 발언은 미국이 달러화 대비 원화 약세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킨 셈이어서, 역내 시장의 달러화 상승 예상 배팅(롱 포지션)을 위축시킬 것이란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지난 연말, 금융당국의 적극적 개입에도 환율이 다시 1480원을 위협하는 것은 일본의 계속된 엔화약세의 영향도 상당하다. 어제(14일)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159엔을 넘었다. 1년 6개월 전의 161엔 이후 가장 높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다음 달 조기 총선을 치르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오자, 확장재정에 따른 건전성 우려와 일본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미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구윤철 부총리와 같은 날,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도 베선트 미 재무장관을 만났다. 가타야마 재무상은 베선트 장관과 양자 회담 직후 "엔저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국면이 있어 매우 우려했다고 전달했고 베선트 장관도 이런 인식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또 "투기적 움직임에 대해 어떤 수단도 배제하지 않고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같은 시점에 한국과 미국, 일본이 외환시장에 강력한 구두개입에 나선 셈이다. 이론적으로 원화와 엔화 가치의 약세는 한일 두 나라의 수출경쟁력에는 긍정적 요소이다. 물론 통화약세가 과도해 위기 국면을 맞은 것이지만 그 어려움을 미국과 논의하는 모습은 의아하다.
한일 모두 대미투자 약속한 국가..美관심은 '투자이행'
상황에 대한 실마리는 역시 미 재무부의 발표에서 짐작할 수 있다. 베선트 장관이 구 부총리와의 면담에서 원화가치 문제와 함께 '한미 간 무역 및 투자 협정'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협정이 미국과 한국의 경제 파트너십을 더욱 심화하고, 미국 산업 역량의 부흥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미국 경제수장의 이례적 구두개입은 최근의 원화 약세 주요인으로 관세협상 합의에 따른 연 200억 달러, 총 3천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증권사인 iM증권의 박상현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한·미 관세 협상에 따라 올해부터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가 충실히 이행되기 위해서는 과도한 원화 가치 하락이 미국 입장에서도 불편한 상황이어서 한국 외환 당국과 공조에 나선 것이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돌아보면 한미 간 관세협정 팩트시트에는 '시장 불안이 우려될 경우, 한국이 투자시기와 규모 조정을 요청할 수 있고, 미국은 성실히 검토한다'는 내용이 있다. 구윤철 부총리가 이번 방미에서 원화 약세에 따른 투자이행의 어려움을 언급했을 수 있고, 이에 따라 베선트 장관이 환율과 관련한 메시지를 내놓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결국 이례적인 구두개입은 원화 약세가 지속될 경우, 한국이 약속한 대미투자가 차질을 빚거나,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역시 5천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에 합의한 일본도 베선트와의 회담에서 사실상 같은 맥락의 논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장의 관심이 커지자 구 부총리의 방미에 동행했던 최지영 국제경제관리관은 오늘(15일) 브리핑을 통해 "미 재무장관이 개인적 측면에서 한국의 환율을 언급한 것은 제 기억으로는 처음"이라며, 미국 측에 구두개입을 요청했느냐는 질문에는 "요청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며 "한미 간 공동된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요청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정부는 티를 낼 수 없겠지만,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계속된 원화 약세의 원인이 되고 있는 한국의 막대한 대미투자금을 의식해 이례적인 구두개입까지 하는 미국의 행태는 얄미울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달러 상승' 기대 여전..한국은행은 금리동결
한국은행은 시장의 예상대로 오늘(15일) 기준금리를 연 2.50%로 동결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환율이 중요한 결정 이유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나라는 대외 채권국이기 때문에 환율이 올라도 과거와 같은 금융위기는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환율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현물 시장에서 달러를 팔지 않고 빌려만 주는 것이 문제"라고 진단했다. 새해 들어 환율은 작년 10∼11월과 비슷한 수준으로 빠르게 올랐다. 국내 개인 투자자는 올해 들어 13일까지 약 22억 달러 규모의 해외 주식을 순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지난해 12월의 순매수 규모, 15억5천만 달러를 뛰어넘은 것이다. 외환당국의 개입으로 떨어진 환율 상황을 달러 자산 매입기회로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만큼 시장은 달러 대비 원화가치의 약세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고민이 클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서학개미의 국내 증시 회귀를 유도하고, 기업 보유 달러화를 시장에 푸는 단기 대책도 필요하지만, 원화 가치가 구조적으로 오르는 흐름을 만드는 중장기 대응을 병행해 나갈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는 '미란 보고서'는 무역수지를 위한 '약달러'정책의 필요성이 포함돼있다.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집권 초반에 휘둘러 온 고관세 정책이 무뎌질 경우엔, 반대로 달러화 가치의 약세를 유도하는 정책을 펼 가능성이 거론된다. 환율 전쟁은 시간과의 싸움이 될 전망이다.
(사진 자료 : 연합뉴스, 디자인 : 정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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