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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의 다시 쓰기는 성공했을까? [스프]

[취향저격] 원작 재창작 뮤지컬의 환상성 구현 핵심 포인트 (글: 장은진 대중문화평론가)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명작의 귀환. 영상예술이 무대로 옮겨진 장르 전환이자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작년 가을 <라이프 오브 파이> 티켓팅이 시작됐을 때 뮤지컬이란 소개에 다소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라이브 온더 스테이지라는 뮤지컬로 분류되며 국내 무대에 올랐다. 2013년 국내 개봉된 영화 원작의 탄탄함 덕분인지 입소문과 함께 평일 공연도 VIP석과 전체 조망이 가능한 2층의 파노라마 석은 일치감치 매진되는 티켓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2002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캐나다 출신 작가 얀 마텔의 원작을 2012년 이안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 감독상과 촬영상, 시각효과상 등 4관왕에 올랐던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할리우드 컴퓨터그래픽과 VFX가 어느 정도 수준급 완성도를 보여주던 시기였지만, 호랑이와 좁은 보트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인간의 모습, 바다 위를 나는 날치와 다랑어 떼, 향유고래, 그리고 낮이면 미어캣으로 가득하고 밤이면 투명한 형광색으로 빛나던 식인섬이라는 환상성을 스크린에 구현하면서 극찬을 받았다.

과연 그 '환상성'을 무대에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이 공연의 핵심이다. 표류하는 바다 위 파이와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대결에 대한 의문은 박정민과 박강현이란 두 배우와 촘촘한 재질의 근육까지 표현한 동물을 연기한 퍼펫티어들의 움직임, 디테일한 조명과 시각적 장치들이 해답을 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배우들의 노래를 듣거나 군무를 볼 수 있는 뮤지컬이 아니라, 대사와 동작으로 이뤄지는 연극에 가깝다. 노래하는 박정민 대신 맨발과 병상 위 독백 연기가 대부분이다. 이 작품의 미학이라면 초반 동물원 배경 장면에 등장하는 염소나 작은 동물이 살아 날뛰는 움직임부터 호랑이·오랑우탄·하이에나·얼룩말 등 죽음을 앞둔 동물들의 근육 하나하나까지 손과 발로 연기한 퍼펫티어들의 세심한 손동작, 파도와 바다를 표현한 프로젝션 맵핑과 조명,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사운드가 어우러지며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종합예술의 최대치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동안 환상성을 표현해야 했던 판타지 뮤지컬에서 배우의 움직임이나 조명에만 의존해 아쉬웠던 부분들이 영상효과로 보완되며 영화와는 또 다른 시각적 만족을 주고, 배우들이 움직이는 가변적 무대 장치와 음악의 밸런스는 한국 뮤지컬의 수준이 한층 더 발전했음을 느끼게 한다.

박정민이 보여준 파이는 초반부 종교에 심취하는 순수하고 괴짜 같은 소년미를 발휘하고, 후반부로 가면서 실제와 환상, 진실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로서 성찰자의 모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주로 영화에서 활동했던 그가 호흡이 긴 무대로 도전한 이번 경험은 앞으로 연기자 박정민의 깊이와 위치를 공고하게 해 줄 듯하다. 무대가 끝난 후 주연 배우 못지않은 박수를 받았던 퍼펫티어 팀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진정한 주연들이다. 세 명 혹은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를 완벽하게 구현해 낸 것에 대한 박수를 보낸다. 퍼펫티어들이 손으로 얼굴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 보이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손동작이 만들어내는 디테일한 표현만을 인지한다. 죽음을 앞둔 생명의 마지막 떨림, 신뢰하는 상대를 향한 믿음과 반가움의 반응, 고통과 공포, 환상성을 극대화시키는 고요하고 다이내믹한 움직임까지, <라이프 오브 파이>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빛났던 수많은 생명들의 움직임을 표현했던 퍼펫티어들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완성도 있는 무대를 만들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극 전체의 진중한 톤을 유지하기 위한 전체적인 호흡이다. 관객들은 숨죽이며 보기 바빴지만, 중간중간 숨통을 틔워줄 개그나 현지화된 대사로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몰입은 잘 됐으나 경직된 관객에게 잠시 웃을 수 있는 부분을 넣어줬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다만 이는 원작자와의 협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니 어려울 수도 있었겠지만.

2019년 영국에서 초연된 뒤 코로나 시기를 거쳐 2021년 정식으로 웨스트엔드 무대에 올랐던 <라이프 오브 파이>는 국내에 오리지널 투어가 아닌 한국어로 공연되는 세계 최초의 공연이다. 한국 1세대 뮤지컬 기획자로 수많은 공연을 기획해 온 설도권, 설도윤 형제가 이끌고 있는 에스앤코가 쏟아져 나오는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수많은 작품 중 대중적이고 흥행이 예견된 안전성 있는 작품이 아닌 다소 도전적인 이 작품을 선택한 배경에는, 이미 높은 수준으로 올라선 한국 관객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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