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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에 못 맡긴다" · "회의 불참"…자주파의 궐기?

'트리거'된 정연두-케빈김 회의…업무보고에서 일단락될까

"외교부에 못 맡긴다" · "회의 불참"…자주파의 궐기?
"전문성이 없고, 남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인사 6명이 한 목소리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5일 발표된 전직 통일부 장관들의 공동성명을 통해서 입니다. 이 성명에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당시 통일장관을 지낸 임동원·정세현·이재정·조명균·김연철·이인영 6인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전직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메시지가 직설적이고 그 수위도 상당히 셉니다. 이재명 정부 안에서 불거져 온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 노선 갈등이 이번에는 '외곽'에서 보다 선명히 표출된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조현 외교부 장관과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지난 8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있다.

전직 통일장관 6인이 역시 민주당 정부인 이재명 정부의 외교부를 향해 이렇게까지 반감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워킹그룹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교부가 9일 한미 당국이 '정례적 정책 공조회의'를 통해 '대북정책 전반을 논의'(9일 외교부 정례브리핑)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제2의 워킹 그룹이 출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던 겁니다. 한미 워킹그룹은 남북미 대화가 가동되던 2018년 11월 출범한 한미 당국 간 협의체입니다. 한국 측에선 당시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수석대표로 통일부와 청와대 실무진 등이 참가했고, 미국 측에는 스티븐 비건 당시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수석대표로 국무부, 백악관 관계자 등이 참가했습니다. 비핵화와 대북 제재, 남북 협력 방안 등을 폭넓게 논의하기로 했지만 실상 미국의 허가를 득하는 '족쇄'로서 기능했다는 것이 통일부 안팎의 인식입니다. 2019년 1월 문재인 정부가 '인도적 목적'으로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를 북한에 보내려고 추진했을 당시에는 운송 수단인 트럭이 문제가 됐던 것이 대표적 사례로 거론됩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직후 "훌륭했던 북남 합의가 한 걸음도 이행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남측이 스스로 제 목에 걸어 놓은 친미 사대의 올가미 때문"이라며 워킹그룹을 비난한 바 있습니다. (통일부의 인식과 달리 당시 외교부 인사들은 제재 면제를 위한 협의의 창구로서 워킹그룹이 유효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훼방이었다기보다는 대북 제재의 범위가 광범위하고 촘촘해졌다는 점에서 이를 해소하는 것 자체가 까다로웠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결국 워킹그룹 회의는 2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한미 외교 당국이 오늘(16일) 가동한 회의의 우리측 수석 대표로는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이, 미국 측 수석 대표로는 케빈 김 주한 미 대사대리가 나섰습니다. 외교전략정보본부장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후신 성격으로, 북핵 관련 정책이 주요 의제로 다뤄진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케빈 김 주한 미 대사대리는 트럼프 1기 당시 북미 협상 실무에 관여한 경험이 있습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 시키려면 (북한에) 보따리를 챙겨줘야"하는데, "그런 것을 다 빼버리고 수시 협의를 통해 워싱턴을 가지도 않은 채 주한 미국 대사 대리와 협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왜 미국의 지시를 받는 식으로 하느냐"며 강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인영 전 장관도 바람직한 방안이 아니라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이 전 장관은 자신을 이른바 '자주파'로 분류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워킹그룹이 성과가 없었고, 없어진 이유가 있는데 이를 되돌리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제재를 완화하거나 해제하는 시점에 회의가 가동되면 기대를 할 수 있지만 지난 시기 워킹그룹은 누가 봐도 제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전직 장관들의 공동성명 추진 과정을 잘 아는 한 소식통은 특히 원로들의 분노가 상당했다고 상황을 전했습니다.

전직 장관들의 입장을 길게 전한 것은 통일부의 문제 의식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통일부는 어제 한미 당국 간 회의에 '불참'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불참을 발표한 어제 입장을 뜯어 보면 통일부의 속내가 비교적 쉽게 읽힙니다. 해당 회의에 대해 통일부는 '조인트 팩트시트의 후속 협의에 대한 내용으로 알고" 있다며 '한미 외교 현안 협의'라고 규정했습니다. 사실상 대북 정책 공조를 위한 회의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면서 "국방정책은 국방부가, 외교정책은 외교부가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남북대화, 교류협력 등 대북정책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필요시 통일부가 별도로 미 측과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통일부 안팎에서 과거 워킹그룹은 일종의 '악몽'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적어도 과거와 같은 형태의 회의를 가동시키지는 않겠다는 뜻은 명확해 보입니다.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정보본부장(왼쪽)과 케빈 김 주한 미 대사대리

그렇다면 한미 외교 당국 간 회의가 제2의 워킹그룹이 되지 않는다면 과연 이 갈등은 잦아들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이번 회의는 하나의 '트리거'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북 정책의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놓고 정부 내에서 이견이 쌓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켜켜이 쌓여 온 인식의 차이가 이번 사태로 인해 직접적으로 분출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직 통일장관들은 "과거 남북관계 역사에서 개성공단을 만들 때나 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 외교부는 미국 정부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고 보수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정동영 통일장관의 인식도 이 연장선에 있습니다. 정 장관은 특히 외교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구성에 대해 문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지난 10일 기자 간담회에서 "NSC (구조가) 좀 이상하다"며 "박근혜 정부 때부터 장·차관급을 모두 상임위원으로 만든 구조는 행정법 체계에서 예외적인 것이고,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문제는 대통령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7일 기자간담회에서 "현 운영체제는 김대중 정부 이래의 제도와 관행을 따르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설명을 했습니다.) 통일부 안팎에서는 정부조직법을 따져보더라도 대북 정책은 통일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

일련의 흐름을 보면 외교부와 통일부, 혹은 국가안보실과 통일부 사이 이견이 계속 노출되는 상황에서 전직 통일장관들의 성명은 통일부에 힘을 싣는 차원으로도 보입니다. 대통령실은 부처 간 이견은 있지만 갈등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어제(15일) 브리핑에서 "북한과 대화에 물꼬를 트는 과정에서 갑갑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 않나"라면서, "이런 가운데 (통일부와 외교부가)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인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도 SBS에 "부처에 따라 관점은 다를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것"이라며, "어느 한 부처의 의견과 방향에 힘이 실리거나 하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부처 간 갈등이 없다는 것은 외교부와 통일부도 공식적으로는 동일한 입장입니다. 국익이라는 목표 하에 서로 다른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설명과 달리 대북 정책 운전대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이미 적지 않습니다. 물밑의 신경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이견이 상당히 노출되었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타협 가능한 수준인지 의문도 제기됩니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원 팀'이 가능한 지에 대해서도 따져 봐야 할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이렇다 보니 결국 이재명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에도 관심이 쏠립니다. 19일 이 대통령은 외교부와 통일부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을 예정입니다. 업무 보고 과정이 공개되는 만큼 부처 간 대북 정책의 주도권 갈등이 이어질지 혹은 어느 한 쪽에 무게가 실릴지, 지켜보고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즉, 이 대통령의 메시지에 따라 최근 일련의 상황이 일단락되는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 정부 안의 상황에 국한될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바늘 구멍'을 뚫기 위해 여러 갈래로 정부 부처들이 해법을 고민하는 와중이지만, 정작 북한의 반응은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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