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과거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향수와 그리움을 건드려 사랑받는 드라마들이 있다. 설령 그때를 모르는 젊은 세대일지라도, '저 때 저랬다고?' 하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지금은 느끼기 힘든 사람 사이의 진한 정(情)을 간접 체험하게 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여기, 또 하나의 잘 만든 과거형 드라마가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힘들었던 시절을 배경으로 가족의 사랑, 친구와의 우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위기를 딛고 일어서는 한 회사의 성장을 그리며 직장 구성원들과의 뜨거운 동료애까지 담은 드라마다. 바로, 최근 종영한 tvN 토일드라마 '태풍상사'다.
'태풍상사'는 IMF의 역풍 속 쫄딱 망해버린 무역회사 태풍상사의 초보 사장이 된 강태풍의 고군분투 성장기를 담은 드라마다. 그룹 2PM 멤버로 출발해 이젠 배우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준호가 주인공 강태풍 역을 맡아 열연했다.
90년대 오렌지족의 전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던 태풍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아버지가 운영하던 무역회사 태풍상사의 부도 위기에 무작정 회사를 떠맡는다. 팩스 한 장 보내는 것조차 몰라 무시받던 초보 상사맨 태풍은 따뜻한 심성과 강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점차 동료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태풍상사를 일으켜 세운다. 그의 성장의 원동력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떤 아픔과 위기가 닥쳐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는 태풍의 모습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삭막한 요즘 사회와 대비돼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준호는 '태풍상사'의 타이틀 롤을 맡아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강태풍의 인간적인 면모와 성장을 매력적으로 그려냈고, 착한 아들, 믿음직한 사장님, 설레는 연인 등의 면면들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그의 열연에 힘입어 '태풍상사'는 첫 회 5%대의 시청률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16회는 시청률 10%를 넘기며 시청자의 사랑을 입증했다.
"'태풍상사'는 작년 6월쯤에 받은 작품인데, 1년 정도 준비하고 촬영에 임했어요. 촬영 시간까지 합치면 1년 4개월 정도 걸렸네요. 항상 작품을 떠나보내는 게 쉽지 않지만, 이번 작품은 유난히 애정이 깊고 떠나보내기가 어려워요.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 있어요."
이준호가 '태풍상사'를 선택한 이유는 힘들었던 IMF 시절을 버텨낸 사람들 사이의 사랑, 우정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IMF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때를 살아왔던 사람들과 그때를 겪지 못한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 모두에게 공감을 줄 거라 생각했다. 특히 그는 12부작이 대부분인 요즘 TV 드라마 시장에서 16부작의 긴 호흡으로 가는 '태풍상사'가 마음에 들었다.
"IMF 시절을 버텨낸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사랑과 우정을 표현하려면 짧은 호흡보단 긴 호흡이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론 요즘 짧은 호흡의 드라마들을 보면, 그 드라마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한창 사랑하고 상황에 깊게 빠질 때쯤 끝나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거든요. 그래서 16부작 드라마가 하고 싶단 마음이었는데, '태풍상사'가 딱이었죠."
1990년생 이준호에게 IMF 시절의 기억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누나와 집에 남았는데, 그런 남매를 돌봐준 이웃에 대한 기억이다.
"윗집 아주머니, 아랫집 아주머니,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정이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따로 약속을 안 잡고 놀이터에 가도 같이 놀 친구들이 있었고요. 그 시절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껴 살던 모습으로 제 기억에 남아있어요. 부모님께 여쭤보면,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국민들 모두가 나라를 살려보자는 마음으로 힘을 합쳤던 시절이라고 하세요.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제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부모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드라마를 잘 소화하고자 했어요."
이준호가 이 작품에 유난히 애정이 큰 이유는, 자신이 연기한 강태풍 캐릭터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청자가 '태풍인 이런 사람이구나', '내 친구가 강태풍이면 좋겠다',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강태풍을 좋아하고 응원했으면 했다"는 이준호. 이런 시청자의 마음은 곧 이준호의 마음이기도 했다.
"태풍이란 캐릭터를 좋아한 거 같아요. 태풍이 같은 모습이 제 20대 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태풍이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뭔가 해내는데 거침이 없죠. 제가 그런 모습을 일찍 가졌더라면 제 20대도 편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캐릭터였어요. 다양한 감정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한 드라마 안에서 보여줄 수 있었던 캐릭터라서 깊은 애정이 남아요."
'태풍상사'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때 그 시절을 고스란히 TV 속에 재현했다는 점이다. 90년대 후반을 살았던 사람들의 외형과 말투부터 시작해 당시 사용하던 온갖 아이템들을 활용해 세기말 시대 분위기를 완벽히 살려냈다. 이준호도 염색 브릿지를 넣은 헤어스타일, 인조가죽 코트를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화려하게 춤추는 '오렌지족 강태풍'을 표현하는 등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시절 쿨의 이재훈 선배님, 드라마 '미스터큐'의 김민종 선배님의 헤어스타일을 참고했어요. 염색 브릿지 피스를 붙여 보기도 했고요. 철저한 고증을 거쳤죠. 의상은 실제 그 당시에 듀스, 이재훈 선배님의 가수 복장을 시안으로 해서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없으면 사비로라도 제작해서 완성했어요. 그때 당시에 유행했던 핏들을 너무 입어보고 싶었거든요. 오렌지족으로서 그 문화를 잘 즐긴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춤도 그때 유행했던 음악에 당시 스타일로 안무를 받아 준비했어요. 제가 드라마에서 춤과 노래를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이 작품에 애정이 커서 더 열심히 준비했어요."
'태풍상사'에선 당시의 리얼리티를 살린 장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강태풍이 친구 왕남모(김민석 분)와 함께 출연한 '사랑의 스튜디오', 태풍상사 직원들이 함께 노동한 후 받은 임금을 유니콘을 타고 기부한 '체험 삶의 현장', 왕남모가 군시절 엄마와 눈물의 정을 나눈 '우정의 무대' 등 당시 인기를 모았던 TV 프로그램들이 묘사된다. 또 인물들은 삐삐, 시티폰, 모뎀 등 구식 기기들을 사용하고, 지금은 컴퓨터로 쉽게 만들 수 있는 문서들을 직접 표를 그려 수기로 작성한다. 당시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요소요소들이 그 시절의 감성을 자극해 색다른 재미로 다가온다.
"재밌는 포인트였죠. 저도 어렸을 때 TV로 봤던 프로그램들이니까요. '체험 삶의 현장' 장면에 나왔던 유니콘은, 실제 그 시절에 유니콘을 만든 분이 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미술팀, 소품팀이 고생 많이 했죠.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옛것을 표현해야 했으니까요. 태풍상사 사무실에 있던 타자기는, 실제 그 당시에 썼던 걸 박물관에서 가져왔다고 해요. 또 도로 바닥도 빨간색 보호구역이 그때는 없었던 때라, 촬영하면서 바꿨다가 끝난 후 다시 원상복구 시켜놓고 그랬어요. 야외 촬영을 하면 현대 문물이 너무 많이 보여서, 시간과 장소도 고려하면서 찍었어요. 심지어 자동차 라이트 하나도 웬만하면 피해 가면서 촬영했죠. 다들 고생 진짜 많이 했어요."
캐릭터 싱크로율에 대해 묻자 이준호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강태풍이 닮은 거 같다고 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태풍이에게는 제 초등학교 때 모습이 있는 거 같아요. 솔직하고 재빠르고 표현 잘하고, '초딩미' 같은 게 있죠. 지금의 저와 가장 닮은 건, 뭔가 하고자 할 때의 추진력 같아요. 접근 방법은 다르죠. 전 엄청 고민해서 계획을 차근차근 만드는데, 태풍이는 바로 '고(GO)' 하죠. 태풍이의 성격은, 제가 20대 때 가졌으면 좋았겠다 생각해요."
이준호는 강태풍 같은 솔직한 모습이 자신의 20대에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표현을 여러 번 했다. 그의 20대는 우리도 목도해 온 바다. 2PM 멤버로 활동하며 무대와 예능계를 종횡무진 활약했던 때니까. 그는 스스로 어떤 20대를 보냈다고 생각하기에, 강태풍의 솔직함을 부러워하는 걸까.
"저 자신한테 솔직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태풍이는 '난 이런 사람이야' 인정하며 자기 자신한테 엄청 솔직하고,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도 하죠. 전 어릴 적에 저한테 아쉽거나 부족한 게 있으면 그걸 못 참겠어서 어떻게든 마음에 들 수 있을 만한 단계로 바꿔보려 계속 스스로를 채찍질했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서 지금의 성격이 된 거긴 하겠지만요. 태풍이를 연기하면서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그게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숨김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았겠다' 그런 생각을 가질 정도로요."
강태풍은 태풍상사에 들어간 이후, 커피 심부름 하며 능력을 평가절하 당하는 여직원이 아니라 진짜 상사맨이 되기 위해 애쓰는 오미선(김민하 분)과 같이 성장해 나간다. 그러면서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튼다. 강태풍과 오미선의 풋풋한 로맨스는 몽글몽글한 설렘을 안기긴 했지만, 회사의 존폐가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사랑을 키우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시청자 반응도 있었다. 호불호가 갈린 로맨스에 대해 이준호는 인물들이 그 상황에 몰입해서 나온 진실된 반응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로맨스는 시청자 분들도 그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게 최우선이고, 주어진 상황 속에 몰입해 연기해야 하는 게 배우의 몫이라 생각해요. 태풍상사를 살리는 과정에서 태풍이가 사랑을 한 것도, 너무나도 당연하고 솔직한 수순이 아닐까 해요. 태풍이에겐 미선이가 없었다면, 더 일어나기 어려웠을 거예요. 회를 거듭할수록 고난과 역경이 계속 생기는데, 이걸 이겨낼 수 있는 건 사랑의 힘이 컸어요. 그 사랑이란 건, 엄마와의 사랑, 직원들과의 사랑 등 여러 면의 사랑들이죠. 그중에서 태풍이에게는 미선이가 상사맨의 정의를 알려주고 회사의 직원이 되게끔 도와준 인물이라, 더 마음이 갔다고 생각해요. 철저하게 그 상황 속에 놓여있으면서 진실되게 몰입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준호와 로맨스 호흡을 맞춘 김민하는 과거 2PM의 팬이었다며, 2PM의 팬덤인 핫티스트였다는 고백을 뒤늦게 이준호에게 했다고 한다.
"놀랐죠. 전혀 티를 안 내고 있었거든요. 전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핫티스트였다고 하더라고요. 민하 씨와 대화를 나누면 나이 차이가 크게 안 나는 거 같았는데, 제가 2PM 활동할 때 학생이었다고 해요. 거기에서 인지부조화가 오더라고요.(웃음) 이런 나이차를 겪게 되는구나, 내가 이런 나이가 됐구나. '저를 보고 컸어요' 하는 후배들의 말들을 처음엔 믿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조금씩 인정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준호는 2008년 2PM 멤버로 가요계에 데뷔했고, 연기는 2013년 개봉한 영화 '감시자들'로 시작했다. 어느덧 가수로 17년, 배우로 12년째 활동한 베테랑이다. 그런 그에게 '태풍상사'는 남다른 의미로 남았다. 17년간 몸 담았던 JYP엔터테인먼트를 떠나 최근 O3 Collective(오쓰리콜렉티브)를 설립해 독립에 나선 그는 강태풍의 상황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태풍상사'를 통해 우리가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사람들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에 대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모습이 개인적으로 저한테도 위로가 많이 됐죠. 새 출발을 하는 저한테도, 가족의 건강과 안위를 챙겨야 하는 제 나이에도, '태풍상사'는 저의 삶과 닿는 포인트가 많았어요. 힘들 땐 혼자가 아니라 같이 이겨낼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작품 촬영에 임했고요."
'태풍상사'는 이준호가 '옷소매 붉은 끝동', '킹더랜드'의 연속 흥행 이후 공개하는 작품이라 더 주목받았다. 그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본인의 부담감은 더 컸을 터. 그런 이준호에게 '태풍상사'는 배우로서 '힘을 뺀다'는 의미를 알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절 더 편안하게, 한 꺼풀 더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킹더랜드'와 '옷소매 붉은 끝동' 이후에 보여드리는 작품이다 보니, 이전의 캐릭터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왕이나 재벌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하고 싶다, 지금 이 나이대에 할 수 있는 한 꺼풀 가벼워진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요. '힘을 뺀다'는 게 뭘까, 고민이 많던 때였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걸 조금 깨닫게 된 거 같아요."
'태풍상사'를 성공적으로 끝낸 이준호는 오는 26일 넷플릭스 시리즈 '캐셔로'의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이번엔 손에 쥔 돈만큼 힘이 강해지는 생활밀착형 히어로 캐릭터를 연기한다. 이번에도 '태풍상사'처럼 '힘을 뺀' 이준호를 만나볼 수 있다. 연이어 작품을 공개할 만큼 배우로서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 이준호. 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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