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눈이 펑펑 내렸던 지난 4일, 임윤찬이 협연하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보러 예술의전당에 갔다가 예상 밖의 앙코르 연주를 만났습니다. 귀갓길 내내 앙코르 곡을 흥얼거렸고 지금까지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사실 임윤찬이 본 프로그램으로 협연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은 프랑스 작곡가인 라벨이 1928년 미국에서 공연하면서 접했던 재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는데요, 다채로운 매력을 담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쾌한 리듬과 선율로 재즈의 활력을 뿜어내면서도, 느린 2악장은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서정성으로 가득하죠. 임윤찬의 거침없고 리듬감 넘치는 연주에선 과연 재즈의 향기가 물씬했고, 2악장에서는 마치 모차르트 실내악인 듯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음악의 매력을 극대화했습니다.
협주곡으로서는 다소 연주 시간이 짧은 편인 이 곡의 연주가 끝나자, 벌써 끝났나 싶어 아쉬웠습니다.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와 탄성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협주곡은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의 1부에 배치되는데요, 2부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협연자로서는 연주를 끝낸 것이니, 오케스트라는 무대에 그대로 앉아 있는 채로 협연자가 독주 앙코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이날도 임윤찬은 거듭된 커튼콜 끝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앙코르 연주를 시작하는데, 처음엔 '어? 설마? 했습니다. 전주 끝에 주 멜로디가 시작되자 확실해졌습니다. 임윤찬이 연주한 곡은 샹송의 대명사 '고엽(Les Feuilles mortes)'이었습니다.
'고엽'은 프랑스 시인 자크 플로베르가 작사하고 조제프 코스마가 작곡한 프랑스 샹송 불후의 명곡입니다. 1946년 프랑스의 배우 겸 가수 이브 몽땅이 처음 불렀고, 1950년 영어 버전으로 번안된 이후 빙 크로스비, 냇 킹 콜 등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습니다. 특히 미국의 피아니스트 로저 윌리엄스가 연주한 재즈 피아노 버전은 1955년 빌보드 메인 차트 1위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피아노 독주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건 이 곡이 유일합니다.
임윤찬이 연주한 건 직접 편곡한 버전이었는데, 약간 즉흥성이 가미된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편곡 과정 자체가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윤찬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한자리에서 '고엽'을 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상상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여기선 꾸밈음을 넣어보고, 저기선 화성을 살짝 바꿔보고, 이런 식으로요.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이렇게 임윤찬이 치는 '고엽'을 듣고 있으니 약간 멜랑콜리해지기도 하고, 좋더라고요. 눈 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아담한 재즈 바 구석에 앉아 연주를 듣고 있다는 상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고엽' 연주를 마친 임윤찬은 그래도 끝나지 않는 박수 속에 퇴장과 재입장을 반복하다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두 번째 앙코르는 코른골트의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코른골트는 20세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라 '죽음의 도시' 등 걸작을 남겼습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미국으로 망명해 활동했고,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기반을 닦은 작곡가로도 유명하죠.
'가장 아름다운 밤'은 코른골트의 오페라 '조용한 세레나데'에 나오는 곡입니다. 1946년 코른골트 자신이 이 곡을 직접 연주한 영상이 남아있는데요, 코른골트의 허밍까지 함께 하는 이 연주를 들으면서 짙은 낭만과 향수에 젖게 되더라고요.
https://youtu.be/NXDuBKvQ8-U?si=l_PU958h5f5jxI4N
▲ 작곡가 코른골트가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밤' (Brendan Carroll 유튜브)
임윤찬은 몇 달 전 코른골트의 연주 영상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공유했고, 최근 직접 이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올여름 베르비에 페스티벌 등 해외 연주에서도 이 곡을 앙코르로 연주했다고 합니다.
https://youtu.be/71huFrQ7760?si=Nt9GQ9cY7JhZ8ReE
▲ 임윤찬이 유튜브채널에 올린 '가장 아름다운 밤' (Yunchan Lim 유튜브)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앙코르 '고엽'으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재즈의 향기와 낭만으로 가득했던 임윤찬의 앙코르 선곡은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관객을 설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2부 오케스트라만의 연주도 이 분위기를 이어가는 듯했습니다.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 대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이 연주되어 심금을 울렸습니다. 역시 뜨거운 박수를 받은 오케스트라는 앙코르로 '우리가 이탈리아 레퍼토리를 빼놓을 수 없지', 하는 듯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연주했습니다. 공연의 문을 열었던 첫 곡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서곡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듯 멋진 마무리였습니다.
사실 이날 공연은 '역대급'으로 객석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벨 소리, 카메라 버튼 소리가 울렸고, 한 관객의 휴대전화에서 유튜브 영상이 재생되어 큰 소리가 나자, 연주 중이던 임윤찬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어 객석을 쳐다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연주자도 그랬겠지만, 저도 한창 음악에 빠져 있는 도중 방해받은 느낌이라 조금 언짢아졌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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