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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가 될 뻔했던 비운의 스케이터 남나리 [스프]

[별별스포츠+]

남나리
스케이팅 시즌이 한창인데요, 피겨 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있지요? 바로 피겨 여왕 김연아입니다. 그런데 김연아에 앞서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바로 재미동포 남나리 선수입니다. 13살에 깜짝 스타로 떠올랐지만 부상으로 너무나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천재이었습니다.


5살에 피겨 시작, 8살 때부터 폭풍성장
한국 이름은 남나리, 미국 이름은 나오미 나리 남입니다. 1985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는데요, 김연아 선수보다는 5살 많습니다. 남나리 선수의 부모는 일찍이 미국에서 생활 터전을 잡았고 교포 2세인 남나리는 5살 때 처음으로 스케이트화를 신었습니다.

남나리의 외할아버지가 빙상선수 출신인데요, 외할아버지와 아이스링크에 가면서 피겨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7살 때인데, 8살 때 동계올림픽 미국 피겨팀 코치였던 존 닉스에게 발탁되면서 기량이 급성장했습니다. 남나리의 어머니는 남편 월급의 30%에 이르는 2천 달러의 레슨비가 부담이 됐지만 워낙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 이를 감수했다고 합니다. 결국 가족들의 헌신 끝에 남나리는 1995년 주니어 올림픽 1위를 차지했고 1997년에는 미국 신인선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성할 싹이 보이자 학교도 1주일에 한번 나가 과제와 검사를 받는 홈스쿨링으로 바꾸고 하루 3시간 이상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고 각종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13살 재미동포 소녀 전미선수권에서 깜짝 은메달
남나리

1999년 전미선수권대회가 남나리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이 대회는 그해 2월 7일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개막했는데, 3년 뒤 2002 동계올림픽이 예정됐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당시 만 13세 7개월의 남나리는 이 대회가 생애 첫 시니어 출전이었습니다. 우승 후보는 단연 3회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미셸 콴이었습니다. 콴은 1년 전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습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콴이 예상대로 1위, 남나리는 4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프리 스케이팅에서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남나리는 트리플 플립, 트리플 토룹 등 3회전 점프를 깔끔히 뛰었고, 화려하고 빠른 스핀, 역동적이고 발랄한 연기로 탄성으로 자아내게 했습니다. 당시 중계 캐스터는 "이 스핀은 어떤 선수들보다 빠릅니다. 이 레이백 스핀 보세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나요? 정말 대단한 순간입니다."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클린 연기가 끝나자 남나리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현장에서 딸의 연기를 지켜본 부모는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중계 캐스터도 흥분한 듯 "이제 13살인 이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엄청난 연기였습니다. 남나리의 부모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분입니다. 피겨계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 같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선수 대기실에서 TV로 남나리의 연기를 지켜보던 미셸 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는데요, 남나리는 프리 스케이팅에서 2위를 차지해 종합 점수에서 미셸 콴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하는 깜짝 성적을 거뒀습니다. 이때 남나리에 밀려 4위에 그친 선수가 사라 휴즈인데 휴즈는 3년 뒤 솔트레이크 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것만 봐도 남나리가 얼마나 잠재력이 컸던 선수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폭발적 인기, 한국에서도 '남나리 신드롬'
남나리

남나리의 깜짝 은메달은 한마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거의 신드롬이었는데요, 1999년 청와대가 선정한 한국을 빛낸 인물에 야구스타 선동열, 박찬호와 함께 선정될 정도였습니다.

국내에서 인기가 치솟자 바로 귀국이 추진됐고 준우승한 지 20일도 안 돼 방한했습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취재진 카메라 플래시를 한 몸에 받았는데, 엄청난 환영에 13살 소녀는 환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와서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질문)
"쇼핑하고 싶어요. 다음 올림픽이 2002년인데요, 올림픽 금메달 따고 싶어요."

도착 직후부터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과 팬들의 공연 요구로 박찬호, 박세리 못지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데요, 국내 특급 호텔 초청으로 방한한 남나리는 스위트룸에 4박 5일 동안 묵으며 팬들을 위한 무료공연과 사인회를 가졌습니다. 남나리는 우리 피겨 국가대표 3명과 함께 20여 분 동안 공연을 펼쳐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때가 이른바 'IMF 시절'로 우리나라가 매우 힘들었는데요, 외국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있던 박세리, 박찬호에 환호하고 있던 때인데 13살의 앳된 재미동포 소녀가 혜성처럼 등장해 일약 동계올림픽 메달 후보로 떠오르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 덕분에 남나리는 국내 유명 가전회사의 광고 모델로 TV에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13살 소녀는 뜨거운 관심 속에 출국하면서 "한국에 와서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너무 행복해서 안 가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라는 인사말을 남겼습니다.


고관절 부상 불운, 올림픽 메달의 꿈 좌절
남나리

남나리는 전미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따냈지만 세계선수권 출전은 불가능했습니다. 국제빙상연맹의 15세 미만 국제대회 출전금지 규정 때문인데요, 나이가 어렸던 남나리는 2002년 동계올림픽을 내다보고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2000년에 큰 불운을 겪었습니다. 2000년 7월부터 고관절이 좋지 않았는데 몇 달 뒤 트리플 러츠 점프 훈련을 하다가 펑 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후 골절 진단을 받았습니다. 고관절을 크게 다치면서 선수 생활에 최대 위기가 온 것이지요.

한동안 은반 위에 서지 못하던 남나리는 고난도 점프를 많이 뛰어야 하는 싱글을 포기하고 2005년 페어로 전향하며 복귀했습니다. 이후 남자 선수인 레프테리스와 짝을 이뤄 2006년 그랑프리 대회에서 동메달, 2007년 전미선수권에서도 페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으로 계속되었던 엉덩이뼈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2008년 10월 현역에서 은퇴하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남나리는 이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케이팅을 할 때마다 엉덩이뼈 연골에 부담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스케이팅을 계속하면 부상이 재발할 수 있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건강을 고려해 현역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피겨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빙판에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워준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니까 13살 때 세계적 스타 가능성을 보였던 남나리는 너무나 일찍 부상 악재에 발목을 잡혀 선수로서 올림픽 출전이라는 자신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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