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올림픽'으로 불리는 쇼팽 콩쿠르 제19회 대회가 지난달 전 세계 음악 팬들의 관심 속에 새로운 우승자 에릭 루를 탄생시키며 폐막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얘깃거리가 이어지고 있네요. 며칠 전 쇼팽 콩쿠르 주최 측은 심사위원 채점표를 공개했습니다. 이어 심사위원장이었던 개릭 올슨의 인터뷰도 공개됐습니다.
개릭 올슨은 1970년 쇼팽 콩쿠르에서 미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던 피아니스트입니다. 조성진이 우승을 차지했던 2015년에도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을 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심사위원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장은 쇼팽의 조국인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가 맡아왔지만 이번에는 그 전통이 깨진 겁니다.
개릭 올슨의 인터뷰는 쇼팽 콩쿠르 웹중계 진행자였던 벤 라우데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1, 2부로 나눠 공개했습니다. 두 사람이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캐주얼한 형식의 인터뷰였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의미심장했습니다. 그가 심사위원장 직을 내려놓을까 고민한 순간도 있었다고 했으니까요. (이 글은 1부 인터뷰를 중심으로 쓰였습니다. )
https://youtu.be/qPXIL3iBCWs
개릭 올슨은 이번 쇼팽 콩쿠르가 '내가 경험한 어떤 콩쿠르보다 심사위원 간의 의견이 갈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심사 결과에 깊은 예술적 불행감을 느꼈고, 심사위원장 직을 내려놓을까 고민하기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결선 진출자가 발표됐을 때였는데, 그가 '우승자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연주자 3명 중 2명이 결선에 오르지도 못했던 겁니다.
그는 1라운드부터 상당히 답답함을 느꼈다고 토로했습니다. 자신을 '페튜니아 화단 속의 양파'로 비유했는데요, 동료 심사위원들의 판단과 자신의 판단이 너무나 달랐다는 거죠. 개릭 올슨이 1라운드에서 22점 이상 높은 점수를 준 출전자 8명은 2라운드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끔찍했어요(Terrible). '대체 무슨 일이야? 내 동료들은 뭘 듣고 있는 거야?' 생각했죠. 하지만 심사위원 한 명의 의견이 아니라, 평균 시스템의 결과이기 때문에 특정인을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듣고, 다른 것을 찾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 콩쿠르는 실제로 역대 최다 수준의 심사 불일치를 보였습니다. 각 라운드에서 탈락한 참가자 가운데서도 심사위원들로부터 최고점(24~25점)을 받은 사례가 무려 28번에 달했습니다. 2021년에는 8번, 2015년에는 단 3번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유례없는 혼선을 보여줍니다. 개릭 올슨은 "각 라운드 점수가 공개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오!' 하는 탄식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쇼팽 콩쿠르의 심사 시스템은 각 라운드마다 1점부터 25점까지 점수를 매기고, 다른 심사위원들의 평균값에서 크게 벗어나면 자동 보정되는 방식을 씁니다. 이는 소수의 심사위원이 극단적으로 높거나 낮은 점수를 줘서 결과가 왜곡되는 걸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최대 편차는 본선 1라운드에서는 3점, 2라운드 이후에는 2점입니다. 즉 2라운드에서 평균 점수가 18.5점인 경우, 어떤 심사위원이 23점을 주었다면 이 심사위원이 부여한 점수는 20.5점(18.5+2점)으로 수정됩니다. 이렇게 조정된 점수로 새롭게 평균 점수를 계산하며, 이는 해당 라운드의 최종 점수가 됩니다. 즉 각 라운드 별 최종 순위에서 보여주는 평균 점수는 '조정된' 점수의 평균값입니다. (쇼팽 콩쿠르 페이스북 계정의 한국어 설명을 옮겨왔습니다.)
결선 연주가 끝나고 수상자 발표까지 5시간이나 걸렸던 것은 이렇게 시스템이 수학적으로 산출해 낸 점수표를 두고 논의가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심사위원단은 이 점수표를 그대로 승인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고, 조정을 시도했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콩쿠르 규정상 어떤 심사위원이 10명 내에서 특정 후보의 순위를 올리거나 내리고 싶다면, 2/3의 찬성을 얻으면 한 단계, 3/4의 찬성을 얻으면 두 단계 조정이 가능합니다. 심사위원단은 여러 조정안을 두고 비밀투표를 거듭했지만, 어느 안건도 2/3의 찬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1등을 내지 말자는 안건까지 나왔다고 했습니다. 결국 5시간 격론 끝에 '시스템'이 내놓은 원래 점수표를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올해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들이 참가자들의 연주가 끝난 뒤 평가하고 있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개릭 올슨은 에릭 루의 우승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크게 안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양심의 가책 없이 만족할 수 있다'고 했고요. 하지만 벤 라우데가 말한 대로, 이 결과에 실망감을 표시하는 청중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에릭 루나 2위에 오른 케빈 첸 개인에 대한 비난은 아닐 겁니다. 이 두 사람은 대회 전부터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혀 왔습니다. 에릭 루나 케빈 첸은 이미 다른 콩쿠르 우승 경력이 있고, 주요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에 설 만한 역량이 입증된 연주자들이니까요.
그런데 모든 심사위원들이 이 두 사람의 수준은 인정했지만, 각자 '정말 특별하다'고 믿은 사람이 달랐습니다. 이렇게 의견이 분산되면서 각 후보의 최종 점수를 상쇄시켜 버렸습니다. 개성이 뚜렷해 심사위원 간에 취향 차이가 나타난 사람은 밀려나고, 평균적으로 안정적인 점수를 받은 사람이 유리했던 셈이죠. 그래서 상당수의 청중이나 개릭 올슨 같은 심사위원이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합의가 부족해서 밀려났다. 그 결과 이번 대회는 경험 많은 연주자들(Veterans), 즉 이미 무대 경험이 풍부한 이들에게 돌아갔다'고 여기게 된 겁니다.
공개된 점수표를 보면 개릭 올슨은 1라운드에서는 최고와 최저점의 차이가 17점에 달했지만, 결선에서는 17점에서 20점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높게 평가했던 출전자들이 대부분 떨어진 다음이라 체념 혹은 포기한 걸까요? 결선에 이미 중상위권 출전자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일까요?
개릭 올슨은 이에 대해 포기했다기보다는 감흥이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결선 무대에서 위대한 예술적 결말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매우 훌륭하고 잘 다듬어진 피아니스트들이었지만, '아, 이 사람이 우승자다!' 라는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기계가 계산해 내놓는 결과대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는 심사위원들 중 누군가가 잘못했다거나 공정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얘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개릭 올슨은 심사위원들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공정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가 출전한 경우 채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정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개릭 올슨의 이야기 중에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콘서트홀 현장에서 듣는 것과 스트리밍으로 듣는 것이 굉장히 달랐다는 겁니다. 스트리밍에서 네티즌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경우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또 에릭 루나 케빈 첸이 이미 다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도 다시 나온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도 과거 부조니 콩쿠르,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쇼팽 콩쿠르에 나갔고,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특히 좋은 연주 기회가 확 늘었다는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경쟁이 더욱 치열하니, 더 좋은 기회를 얻고 싶어 쇼팽 콩쿠르에 재도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그는 콩쿠르 우승은 연주자 커리어의 시작점일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두 종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수상자 발표에 왜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평가 기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술이나 해석, 감정 등 여러 항목 중 어떤 항목이 더 중요한지 물었다고 했는데,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말할 수 없어요. 피아니스트는 한 인간(a human being)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뇌세포와 신체로 이뤄진 복합체입니다. 피아니스트에게 뇌 45%, 대퇴근 15%,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음악은) 모든 요소의 총합입니다. 나는 들으면서 끊임없이 분석하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또 인터뷰 말미에 중요한 얘기를 했는데요, 요즘 연주들은 '너무 빠르고, 너무 시끄럽고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개릭 올슨에 따르면 쇼팽은 서정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만 본질적으로 '형식의 작곡가'입니다. 그런데 빠른 템포에서는 형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대중은 '5초 동안 몇 옥타브를 칠 수 있는지'를 듣고 환호하지만, 자신에게는 '마법이 사라진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음표 뒤에 있는 것'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기계적 기교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자신이 찾는 피아니스트라고 했죠. 그는 자신이 구식일지도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좋은 연주란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개릭 올슨 같은 사람도 있고, 그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각각 다른 게 당연합니다. 콩쿠르 결과는 절대적인 게 아니라,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합의점'을 찾아낸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쇼팽 콩쿠르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두고 질문이 제기됩니다. 쇼팽 콩쿠르의 주된 목적은 신선한 개성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인을 발굴하는 것인가? 완성된 기교와 안정된 해석을 보여주는 연주자를 선발하는 것인가?
쇼팽 콩쿠르를 주최하는 폴란드 국립 쇼팽 인스티튜트의 설립 취지는 쇼팽의 음악, 작품, 세계관을 연구하고 보존하며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쇼팽의 유품과 악보를 수집하고 쇼팽 콩쿠르를 개최하며, 관련 서적과 음반을 출간하고, 박물관을 운영하죠. 전통을 보존하고 전파한다는 이 취지에 따르면 쇼팽 콩쿠르 역시 '모범적인' 연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터이지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개성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것도, 완성형의 모범적 연주를 들려주는 사람을 선발하는 것도 다 그것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만드는 팟캐스트/유튜브 프로그램 커튼콜에서는 SBS의 소문난 '피아노 덕후' 김영욱 PD, 이경원 기자가 출연해 '쇼팽 콩쿠르 결산 수다'를 나눴는데요, 이 때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영욱 PD는 쇼팽 콩쿠르가 폴란드에서 1927년 창설된 당시에, 쇼팽의 작곡가로서의 위상이 지금처럼 대단하지는 않았다고 짚었습니다. 그런데 쇼팽의 음악만으로 연주자를 평가하는 쇼팽 콩쿠르를 통해 쇼팽의 음악이 더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고, 쇼팽 콩쿠르는 '모범적인' 쇼팽의 해석과 연주를 장려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폴리니의 영향이 컸다고 했습니다.
곧 창설 100주년을 맞는 쇼팽 콩쿠르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콩쿠르가 되었고, 작곡가로서 쇼팽의 위상 역시 달라졌죠. 쇼팽 콩쿠르가 이렇게 전통을 보존하고 알리는 역할을 충분히 해 왔으니, 이제는 변화를 추구해도 될 때라는 겁니다. 김 PD는 그러면서 임윤찬 같은 개성 강한 연주자가 쇼팽 콩쿠르에 나갔다면 과연 우승할 수 있었을까,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 이건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음악계 지인들과 종종 나눴던 얘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쇼팽 콩쿠르는 저에게도 많은 질문과 생각할 거리를 남기고 폐막했습니다. 에릭 루나 케빈 첸이 우승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결과에 흥미가 약간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새로운 우승자 에릭 루가 한국에 오면 가볼 생각입니다. 에릭 루에게는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겠지요. 콩쿠르 우승으로 주어진 무대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더 좋은 다음 무대가 계속 이어질 테니까요. 저는 또 빈센트 옹이나 데이비드 크리쿨리, 쯔통 왕처럼 이번 콩쿠르에서 처음 알게 된 연주자들도 한국 무대에서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쇼팽 콩쿠르가 끝난 지 꽤 시일이 흘렀는데도 저는 쇼팽 콩쿠르의 '여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네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상황 자체가 쇼팽 콩쿠르의 크나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음 쇼팽 콩쿠르는 5년 뒤, 2030년입니다. 그때도 저는 또 쇼팽 콩쿠르 얘기를 하고 있겠지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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