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는 비밀이 아니다. 사적인 문제는 세상 전체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지만 비밀스러운 문제는 누구에게도 알리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자신을 선택적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권한이다."
미국 수학자이자 컴퓨터 공학자인 에릭 휴즈가 1993년에 쓴 '사이버펑크 선언문'의 일부입니다.
사이버펑크는 인터넷과 정부의 감시가 강화하는 시대에 강력한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을 옹호하는 디지털 활동가 집단을 말합니다.
위키리크스를 창업한 줄리언 어산지나 P2P 프로토콜 비트토렌트를 개발한 브램 코언 등 많은 프로그래머가 사이버펑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비트코인 창시자로 알려진 사토시 나카모토도 있었습니다.
사토시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과정에서 드러난 중앙은행과 정부의 도덕적 해이를 목격했습니다.
돈벌이에 혈안이 돼 마구잡이로 주택저당채권(MBS)을 발행하며 자기자본의 수십 배 자산을 운용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금융사들을 구제해준 미국 정부 정책에 그는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화폐를 찍어내고, 금리를 낮춰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각국 중앙은행의 무분별한 '권력남용'도 비판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는 금융거래에 있어 중앙이 아닌 '탈중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가 비트코인을 개발한 이유였습니다.
사토시는 2008년 10월 '비트코인:P2P 전자 화폐 시스템'이란 '백서'를 통해 '비트코인'을 선보였습니다.
누구나 보고 참조할 수 있는 공개된 오픈 소스였습니다.
모든 거래 내역을 비트코인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참가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탈중앙화'가 핵심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는 전통적 금융기관이나 제3자 중개 없이 네트워크상에서 개인끼리 직접 송금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금융 시스템을 추구했고, 결국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했습니다.
핀란드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마르티 말미도 사토시의 이 같은 '탈중앙화' 화폐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그는 2009년 사토시와 활발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비트코인 코드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미는 2009년과 2010년 노트북으로 5만 5천 개의 비트코인을 채굴했습니다.
그는 거래소를 설립해 수익 창출보다는 비트코인을 확산하는 데 주력했고, 이런 대의를 위해 비트코인 3만 개(현재가치로 약 4조 7천억 원)를 기부했습니다.
2011년에는 헬싱키의 원룸 아파트를 20만 달러에 매입하기 위해 비트코인 1만 개를 팔았습니다.
2012년에는 구직난을 겪으며 남아있는 비트코인을 대부분 팔았다고 합니다.
말미는 "나는 돈을 버는 일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보다 위대한 무언가를 추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 사토시를 비롯해 오늘날의 비트코인을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기업 변호사이자 금융 서비스 전문가인 비제이 셀밤은 신간 '비트코인 퍼펙트 바이블'
에서 비트코인의 핵심 철학으로 사이버펑크를 지목합니다.
그는 "사이버펑크는 비트코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철학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영향은 비트코인의 탈중앙화된 거버넌스 방식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서가 나온 이듬해인 2009년 무렵 한 개에 0.001달러(1.4원)도 안 하던 비트코인은 16년 만에 11만 달러(약 1억 6천만 원)를 돌파했습니다.
2010년 5월 피자 두 판을 사는 데 1만 개가 사용되기도 한 비트코인은 여러 차례의 반감기(채굴 보상이 4년마다 절반으로 주는 것)를 거치고 미국·홍콩 등 주요 시장에 상장지수펀드(ETF)로 편입되면서 이제는 주류 자산으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자산 순위에서 비트코인은 부동산, 채권, 주식, 금 등에 이어 8위를 기록 중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비트코인이 꾸준히 우상향 궤적을 보여왔다며 앞으로도 지속해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금융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개발 국가에서 활용될 수 있고, 미·중 패권 전쟁 속에서 달러의 대항마로도 주목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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