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브래드버리, 4명 넘어지는 덕분에 우승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씁니다. 운이 7할이고 기량은 3할이라는 뜻인데요. 운이 99%이고 기량은 1%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호주의 스티븐 브래드버리 선수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준준결승부터 운이 따라줘 결승까지 왔는데, 남자 1,000m 결승에서 앞서 달리던 4명의 선수가 마지막 순간에 도미노처럼 서로 넘어지면서 꼴찌로 달리던 브래드버리가 유유히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호주의 첫 동계 올림픽 금메달이자 남반구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이후 그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남의 잘못 때문에 금메달을 놓치는 황당한 경우를 당한 불운의 스타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스타가 바로 대륙의 스프린터 류샹입니다. 류샹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육상 남자 110m 허들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거리 종목을 제패해 그야말로 중국의 영웅이 됐습니다. 2006년에는 세계신기록인 12초88을 수립했고, 2007년 오사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두 달 앞두고 쿠바의 다이론 로블레스가 무섭게 도약했습니다. 이때 그는 류샹의 세계기록을 100분의 1초 단축한 12초87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작성합니다. 그래서 베이징 올림픽 남자 110m 허들은 류샹과 로블레스 2파전으로 압축되며 명승부가 예고됐습니다. 하지만 류샹은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 개최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예선 레이스 시작 직전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아파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13억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그를 '대회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메달은커녕 뛰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라이벌이 사라지자 다이론 로블레스가 가볍게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중국 류샹-쿠바 로블레스, 대구에서 외나무다리 대결
류샹은 베이징 올림픽 이후 슬럼프에 빠졌고 발목 수술 받은 이후로 한물갔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계기로 조금씩 기록을 줄여 나가며 정상 탈환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 우승 후보는 로블레스와 류샹이었는데요, 예상대로 두 라이벌은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 6번째 허들까지는 로블레스가 조금 앞섰습니다. 그런데 7번째 허들부터 류샹이 간발의 차로 선두에 나서 금메달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9번째와 마지막 10번째 허들을 넘으면서 류샹의 속도가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로블레스가 1위, 류샹은 3위로 들어왔습니다. 류샹으로서는 4년 만의 정상 복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는데요, 오성홍기를 흔들며 목이 터지게 응원하던 중국 응원단에서는 금메달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두 선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금메달을 따낸 로블레스는 뭔가 찜찜한 얼굴이었고 류샹은 아쉬움보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느린 화면을 보니까 의문점이 풀렸습니다. 바로 9번째 허들을 넘는 순간 옆 레인에서 달리던 로블레스의 오른팔이 류샹의 왼쪽 팔을 강하게 친 것입니다. 이 여파로 류샹의 속도가 뚝 떨어졌고 균형까지 무너졌습니다. 류샹의 왼쪽 허벅지 뒤쪽이 마지막 허들을 건드리며 3위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허들을 넘을 때도 로블레스는 류샹의 팔을 건드렸습니다.
13초14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로블레스는 쿠바 국기를 들고 트랙을 돌며 세리머니까지 펼쳤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류샹의 코치가 경기 직후 국제육상경기연맹에 항의했고 국제연맹은 비디오 재생 화면을 면밀히 판독한 끝에 로블레스의 실격을 선언했습니다. 규정에 따르면 '레이스 중 상대 선수를 밀거나 진로를 방해하면 그 선수를 실격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로블레스의 금메달은 박탈당했고 2위로 들어왔던 미국의 제이슨 리처드슨이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3위였던 류샹은 은메달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류샹으로서는 그야말로 땅을 쳐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로블레스의 반칙만 아니었으면 금메달은 거의 확실했는데 라이벌의 반칙으로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결승선 직전에 넘어진 디버스, 그리스 선수 행운의 금메달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진 사례는 여자 허들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미국의 게일 디버스입니다. 디버스는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에서 올림픽 여자 100m를 2연패했던 최고의 스프린터였는데요, 100m 허들에서는 지독한 불운이 겹쳐 4회 연속 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그 저주의 시발점은 바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습니다. 압도적 1위로 금메달을 눈앞에 뒀는데 그만 마지막 10번째 허들에 걸려 넘어지며 5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디버스가 넘어지면서 행운의 금메달은 그리스의 파토울리도우 선수가 차지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이때 강력한 우승 후보는 캐나다의 펠리시언. 2003년 세계선수권 챔피언이자 올림픽 직전에 시즌 최고 기록인 12초49를 작성해 금메달 0순위로 꼽혔는데요, 대항마는 미국의 조애너 헤이스였습니다. 결승전에서 출발 직전에 중계 카메라는 5레인의 펠리시언, 바로 옆 4레인의 헤이스, 두 선수에게 집중됐습니다. 2명 중에 한 명이 금메달을 차지한다는 예상이었지요.
그런데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 나왔습니다. 펠리시언이 첫 번째 허들을 넘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6레인의 선수와 부딪혀 두 선수가 레이스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강력한 라이벌이 사라지자 미국의 헤이스는 부담감을 덜은 듯 쾌속 질주를 거듭했고 12초 37의 올림픽 신기록까지 작성하며 시상대 맨 위에 섰습니다. 허무하게 첫 허들에서 무너졌던 펠리시언은 은퇴할 때까지 올림픽 메달을 단 1개도 거머쥐지 못했습니다.
크라머 코치 실수로 이승훈이 첫 올림픽 금메달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억세게 운이 좋은 선수는 빙속 장거리의 간판스타 이승훈입니다. 스피드스케이팅 최장거리 종목이 남자 10,000m인데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금메달 후보 0순위는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로 적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5,000m와 10,000m 세계 기록을 세웠는데 특히 10,000m에서는 3연속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절대 강자이었습니다. 10,000m에 앞서 5,000천m 경기가 먼저 열렸는데 예상대로 최강 크라머가 금메달을 따냈고 우리나라의 이승훈 선수가 역주하며 깜짝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기세가 오른 이승훈은 스피드 스케이팅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남자 10,000m에서 12분58초55로 먼저 경기를 끝냈습니다. 올림픽 신기록까지 세웠지만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바로 크라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반부터 힘차게 달린 크라머는 레이스 중반까지 이승훈보다 기록이 앞서 금메달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2명이 함께 경기를 치르는데 레이스를 방해하거나 충돌 사고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레인에서 달립니다. 그리고 형평성을 위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번갈아가며 질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8바퀴 반을 남기고 확률 1%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6,600m쯤에서 레인 체인지를 해야 하는데 인코스를 달리던 크라머는 당연히 아웃코스로 나가야 했습니다. 크라머가 아웃코스로 빠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크라머 코치인 제라드 캠커스 코치가 손가락으로 인코스로 들어가라고 가리키자 크라머는 급하게 방향을 바꿔 인코스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인코스를 두 번 연속 타면 실격이 됩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는 크라머는 계속 경기를 이어나갔는데 TV 중계 화면은 크라머의 규정 위반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바퀴가 남게 되자 크라머 코치도 자신의 실수를 간파한 듯 머리를 감싸 쥐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이승훈과 우리 지도자들은 금메달 딴 것을 확신하고 환호했습니다. 크라머는 이승훈보다 빠른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자신이 금메달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캠커스 코치가 급하게 달려와 실격 사실을 알리자 크라머는 고글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코치는 "이승훈의 기록을 체크하느라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고 시인했지만 크리머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했던 실격이었습니다. 크라머가 실수를 한 탓에 레이스 막판에는 크라머와 함께 레이스를 펼친 러시아의 스코브레프 두 선수가 같은 레인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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