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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력, 오히려 가해자가 된 할머니…61년 만에 받은 '무죄'

[꼬꼬무 찐리뷰] '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력, 오히려 가해자가 된 할머니…61년 만에 받은 '무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8일 방송된 '나는 죄가 없다-최말자, 61년 만의 재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레드벨벳 웬디, 배우 김남희, 아나운서 박선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나의 이상한 동기

때는 2013년, 부산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이야기는 시작돼. 초등학교 도서실 사서로 일하던 윤향희 씨는 마흔넷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어. 아이들에게 폭넓은 지식을 전해주고 싶어 뒤늦게 대학 공부를 시작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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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초등학교 도서실 사서로 근무했어요. 아이들이 다양한 장르의 책을 접해봤으면 좋겠는데, 제가 조금 지식이 부족하다 싶어서, '얇지만 넓은 지식을 배워야겠다' 해서 입학하게 됐죠."
-윤향희, 2013년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재학

이듬해 2학년이 된 향희 씨는 스터디 팀장을 맡게 돼. 그런데 스터디 멤버 중에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어. 이름은, 최말자. 곧 칠순을 앞둔 할머니야. 향희 씨는 최말자 할머니가 자꾸 신경이 쓰였어.

"굉장히 말씀이 없으시고 점잖으셨어요. 그렇게 잘 웃지도 않으셨고, 또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안 하셨고. 학교를 매일 오시는 거 같더라고요. 보통 오후 7~9시까지 스터디를 진행하는데, 제일 먼저 오세요. 집이 제일 먼데. 다대포에서 화명동 학교까지 약 2시간이 걸리는데, 제일 일찍 오셔서 책상도 다 닦아 놓으시고 차 준비도 다 해놓으시고. 그리고 저희를 항상 맞으시더라고요. 보면은 책이 벌써 너덜너덜해요. 할머니 책은 벌써 새카매 가지고 펴져 있는데 아무 말씀 안 하고 계시고.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였죠."
-윤향희, 2013년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재학

보통 책에서 중요한 부분에만 밑줄을 긋는데, 할머니는 모든 글자 위에 밑줄을 그어 놨어. 중요한 부분만 밑줄을 그으라고 조언하자 할머니는 "나한테는 전부 다 중요합니다"라고 말씀하셔. 근데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데, 할머니는 성적이 안 나와. 한 학기 6과목인데, 3과목이 과락. 낙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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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과목이 과락이 났는지 구체적으로 파고드니까. 리포트 내는 과목인 거예요. '아니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과락이 나왔냐' 하니까, 과제물 제출을 못 했다는 거예요. 제가 봤을 때는 숙제를 안 내실 분이 아니시거든요. 한참 말씀을 안 하시다가, 리포터를 밤새도록 써도 다 날아가서. 리포트를 못 냈대요."
-윤향희, 2013년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재학

리포트는 보통 컴퓨터로 작성해서 온라인으로 제출하지. 할머니는 매번 공책에 적고,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에 옮겨 적어. 그렇게 밤새 열심히 작성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 날아가버리고 없어. 문서를 저장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셨던 거야. 할머니는 한 번도 리포트를 제출하지 못했대. 1학년 때부터 쭉. 그래서 9과목이나 과락을 받았다고 해. 향희 씨는 스터디 팀장으로서 이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 그래서 할머니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드려야겠다 생각한 향희 씨는 할머니가 사시는 집으로 향했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 향희 씨는 집안 풍경을 보고 깜짝 놀라. 할머니가 사시는 작은 아파트 안에, 그동안 공부했던 자료가 가득 쌓여있어. 책과 공책 무더기가 곳곳에 쌓여 있어서, 앉을 공간도 없어. 향희 씨가 집도 좁은데 좀 버리자고 하자, 할머니는 단호하게 외쳤어.

"'이건 안됩니다!' 이러시는 거예요. 근데 그 눈빛이, 제가 순간적으로 느낀 건데, 이 할머니는 공부가 단순한 의미가 아니구나…"
-윤향희, 2013년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재학

할머니에게 공부가 특별한 의미라고 생각한 향희 씨. 그렇게 향희 씨의 특별강의가 시작됐어. 과제물 제출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드린 거야. 할머니가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일주일 후, 향희 씨는 다시 할머니 집을 찾았어. 할머니는 무사히 리포트를 작성했을까? 향희 씨는 할머니의 노트북을 켜고 과제물을 확인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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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렇게 노트북을 딱 켜서 보니까, 한가득 다 쓰여 있는 거예요. 6~7페이지가 빼곡하게. 제가 너무 놀라서 '언니 이거 다 한 거야?' 물으니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닫고 다른 과목을 열어봤어요. 근데 마우스가 계속 줄줄이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놀라서. '언니 일주일 내내 밤새웠어?' 했더니, 새웠대요. 왜? 너무 좋아서. 내가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그 미소가 그냥 입에 귀에 걸리셔서, 너무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이 아직도 제가 눈에 선해요.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거 저 할머니 뵙고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
-윤향희, 2013년 당시 방송통신대학교 재학

할머니는 향희 씨 앞에 서더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한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라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어.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을 지었어. 할머니는 향희 씨를 은인으로 생각했어.

▲ 할머니의 비밀

어느새 4학년이 된 향희 씨는 과 학생회장까지 맡았어. 향희 씨와 최말자 할머니는 나이차가 20년이 넘어. 모녀 관계 같은 차이지. 그런데 친자매처럼 친구처럼 의지하고 지냈대. 그때부터 할머니는 향희 씨를 '회장님'이라 불렀대.

그러던 2018년 여름 어느 날. 졸업 논문을 썼는데 괜찮은지 봐달라는 할머니의 부탁을 받고, 향희 씨가 할머니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어. 근데 분위기가 이상해. 평소 같으면 반갑게 맞아줬을 할머니가, 말이 없어. 향희 씨 앞에 정자세로 마주 보고 앉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향희 씨는 긴장했어. 잠시 후 할머니가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어.

"회장님 덕분에 제가 대학 졸업이라는 첫 번째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근데 저한테 두 번째 소원이자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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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뭔가를 건네줘. '내가 걸어온 길, 앞으로의 길'이라는 제목의, 할머니가 쓴 논문이야. 할머니는 논문을 건네며 "이걸 읽기 전에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고 말했어. 그리고 한참 뒤,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해. 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렇게 망설이는 걸까. 최말자 할머니께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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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 얘기를 하기가 정말 조심스러웠어요. 나이가 비슷하면 좀 덜 부담스러울 건데, 자식 같은 사람한테 그 얘기를 한다는 그 자체가 내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거든요. 그 논문을 쓰기 위해서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전부 돌아보았을 때, 그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어쨌든 이 사건을 밖으로 꺼내야 한다는 거,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거. 참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죠. 그렇게 얘기를 쭉 했어요."
-최말자 할머니

할머니는 아주 긴 얘기를 시작해.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금부터 말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 악몽 같은 그날밤

할머니는 1946년 경남 김해에서 농사꾼의 셋째 딸로 태어났어.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말자'라는 이름이 싫었대. '끝말'에 '아들자'. '딸 그만 낳고 다음번엔 아들 낳아라'는 뜻이야.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였잖아. 그래서 이런 이름이 많았어. 할머니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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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를 졸업한 말자 씨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았어. 일손을 도우라며. 말자 씨는 단식투쟁을 하며 학교에 보내달라 했지만,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 안 했어. 일주일을 버티다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농사일을 돕게 됐어. 말자 씨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을 보며 속상해서 많이 울었대. 말자 할머니가 환갑이 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한 이유. 이제 좀 알겠지?

할머니가 열여덟이 되던 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악몽 같은 사건이 일어났어. 1964년 5월 6일. 옆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말자 씨네 집에 놀러 왔어. 그런데 친구들을 따라온 한 남자가 있었어. 그 남자는, 옆마을에 사는 스물한 살 노 씨. 말자 씨는 처음 보는 남자였어.

시간이 늦어 친구들이 집에 가야하는데, 그 남자가 여전히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어. 이러다가 혹시라도 마실 나간 아버지가 오시면, 집 앞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혼날 게 뻔해. 그래서 말자 씨가 문을 열고 "남의 집에 왜 지키고 섰어요. 가세요!"라고 소리쳤어. 하지만 이 남자, 길을 모른다면서 꼼짝도 안 하더래. 결국 말자 씨는 친구들을 위해 대신 나섰어. "저 남자가 길을 모른다니까 내가 큰길로 유인해 가는 동안 너희는 집에 가라"라면서. 그렇게 말자 씨는 그 남자를 데리고 큰길 쪽으로 걸어갔어.

말자 씨가 그 남자에게 '저 길로 가라'며 길을 알려준 다음에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걸어가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그날밤 겪은 일을 할머니에게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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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까지 데려다주고 '이리 가세요 이렇게 가면 길이 나옵니다' 가르쳐주고 돌아서 오는데.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딱 잡고, 발을 싹 걸어버린 거야. 뒤에서. 그러니까 그냥 사정없이 넘어가. 탁 넘어지니까 머리가 먼저 땅에 닿더라고. 그러니까 정신이 없었죠. 넘어지니까 바로 내 위에 탁 올라타서, 딱 엎드려서 손을 이래 딱 잡고 입을 맞추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최말자

말자 씨는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어. 간신히 뿌리치고 일어서서 도망가는데, 남자는 다시 말자 씨를 쓰러뜨려. 죽을힘을 다해 밀어내고 다시 집으로 뛰어가는데, 이번에도 붙잡혔어. 세 번째 쓰러질 땐, 바닥에 있는 돌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말자 씨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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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에 올라타니 숨을 못 쉬잖아요. 어떻게 하니까 숨이 쉬어지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한참 있으니까 숨이 쉬어져서. 눈을 떠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려니까, 내 예감에 입이 이상해. 느낌이. 그래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옆으로 뱉었어. 뱉고는 일어나서 정신없이 집에 왔죠. 사건은 그렇게 벌어졌어요. 말 한마디 없이."
-최말자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어린 마음에 혼이 날까 겁이 났던 거야. 그런데 얼마 후. 누군가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쳤어. 조금 전 말자 씨를 추행했던 노 씨였어. 노 씨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어.

"내 혓바닥 좀 찾아 주이소."

말자 씨는 그제서야 알았어. 내가 저놈 혓바닥을 깨물었구나. 아까 뱉은 게 저 남자의 혀였구나. 노 씨는 혀가 1.5cm가 절단된 상태였어.

"노 씨 혀가 끊어져서 병원에 가니까, 그 끊어진 혀를 주워오라 그랬대. 그러면 봉합수술을 해준다고."
-최말자

▲ 혀 깨물며 저항한 피해자, 불편한 시선들

한적했던 마을은 이 일로 발칵 뒤집혀. 기자들이 집 앞으로 몰려오더니, 기사가 나기 시작해. 그리고 이런 제목의 기사가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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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 번에 벙어리.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키스는 제2의 정조? 벙어리가 된 청년, 입에 담고 내뺀 처녀'
'키스법 만들어야 할 세상. 아무리 악덕의 사회라도 사람의 혀까지 자르다니'

기사 제목만 보면, 혀가 잘린 남자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느낌이야. 그리고 '키스'라니. 이 단어가 적절해? 이건 엄연한 성범죄잖아. 사랑하는 연인끼리 나누는 '키스'라는 표현은 절대 적절하지 않지.

사건이 보도되고 얼마 후, 말자 씨네 집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혀. 노 씨가 패거리 열 명을 끌고 말자 씨네 집으로 쳐들어온 거야. 부엌에 들어간 노 씨는 식칼을 들고 나와. "이리 나와라! 내가 콱 죽여버린다!" 노 씨는 식칼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노 씨가 온 집안을 헤집는 동안, 말자 씨는 언니와 방 안에 숨어 떨었어.

"미친놈같이 막 뛰어다니고 칼을 막 마루에 치고. '불구로 만들었으면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냐. 나와라. 죽인다' 나는 방에 구석에 앉았고, 우리 언니는 방문을 잡고. 그 문을 잠가 놓고도 그걸 잡고 앉아서 덜덜덜 떨고 있었어요."
-최말자

이 일이 있고 며칠 뒤,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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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끊긴 것도 인연. 결혼시키자>
"노 군 집에서는 노 군과 최 양을 결혼시키자고 제의해왔다. 혀를 잘린 것도 인연이니 두 사람을 결혼시킴으로써 팔자에 없는 벙어리가 된 노 군을 위로하자는 것"

말자 씨 집에서는 단칼에 거절했어. 그러자 노 씨 집에서 치료비와 위자료로 20만원을 요구했어. 1964년 당시 물가, 도시근로자 한 달 평균 소득이 5,990원이야. 20만원이면 거의 3년치 연봉이야. 당시 소 14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대. 말자 씨네 집에서는 이 제안 받아들였을까? 말자 씨는 "돈을 왜 주느냐? 내가 잘못도 없는데 돈을 왜 주냐? 나는 돈 못 준다"라며 펄쩍 뛰었어.

말자 씨 집에서는 노 씨를 강간 미수로 고소했어. 그러자 노 씨는 중상해죄로 맞고소해. 이제 그날밤 사건은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됐어. 그동안 말자 씨는 경찰서를 오가며 조사를 받았어. 근데 경찰조사보다 힘든 건 따로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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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나가면 한 발짝을 못 나가. '저 여자 저기 간다' 같은 또래들도 그랬어. '말자 저 간다' '아 그래 저 가네'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고. 우리 동생이 가도 그러고. 우리 언니가 가도 그러고. 우리 큰언니는 시집살이를 엄청 했어요. 처제라는 여자가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 집구석을 망신시켰다고. 심지어 우리 사돈, 같은 사형 간에도 그러더라고요. 내가 뭔 죄를 지었어요. 그 소리가 듣기 싫잖아요.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죠."
-최말자

주위의 뾰족한 시선은 말자 씨한테만 향한 게 아니었어. 가족들도 고통을 당해야 한 거야. 어린 말자 씨에게 이 상황은 몹시도 버거웠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해. 약국을 다니며 수면제를 모으고, 한 번에 삼켜버렸어. 의식을 잃은 그녀를 살린 건, 가족들이었어. 말자 씨가 정신을 차리자, 엄마는 직접 콩을 갈아서 순두붓국을 끓여줬대. 그렇게 말자 씨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어.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어.

▲ 뒤바뀐 가해자 피해자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노 씨를 강간미수범으로 검찰에 송치했어. 경찰은 말자 씨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인정했어. 위급한 상황에서 말자 씨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본거야. 근데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며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가.

사건이 일어나고 두 달이 지난 7월 초.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이었어. 말자 씨는 아버지와 함께 검찰청으로 향했어. 검찰에서 조사받으러 오라는 소환장이 왔거든. 도착했더니 말자 씨 혼자 들어오래. 아버지를 밖에 두고 혼자 안에 들어선 말자 씨. 근데 그 순간 말자 씨는 한평 남짓 되는 방에 갇혔어. 그리고 수갑까지 채우고 조사가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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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갑을 차고 검사실에 가서 조사를 받았죠. 책상 조그마한 것 앞에 앉혀 놓고, 본인 의자에 구둣발을 탁 얹어놓고 딱 이래가. '남자를 불구 만들었으면 네가 책임을 져야 하지. 왜 책임을 안 지나?' 하길래 '나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고 눈 딱 감고 가만히 있었어. 그러니 '눈 떠, 말해. 바른말 해!' 주먹을 가지고 막 사람을 막 죽일 듯이 칠 듯이 얼굴에 갖다 대 견주고 막. 그렇게 조사를 근 두 달 받은 것 같아요."
-최말자

조사가 끝나자 말자 씨는 구치소로 보내졌어. 수의로 갈아입고 감방 안에 갇혔어. 당시 말자 씨 나이 18살 때 겪은 일이야. 그 후로도 검사의 강압적 조사는 계속 됐어. 검사는 말자 씨에게 "야밤에 처음 본 남자 따라 나간 거 보면, 너도 마음이 있었던 거 아니야?", "너 고의로 혀를 깨물었지?", "멀쩡한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면 시집이라도 가서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싫으면 돈 주고 합의를 하던가"등의 말을 쏟아냈어.

말자 씨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어. "저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그러자 검사는 이런 말까지 했어. "너 순순히 인정 안 하면 평생 감옥에서 살 줄 알아라"라고. 할머니는 강간을 당할 뻔했던 그 순간보다, 검사에게 조사를 받던 그 순간이 더 치욕스럽고 무서웠다고 해.

그렇게 50여 일간의 조사를 마친 검사는 말자 씨를 구속 기소했어. 그리고 구속돼 있던 노 씨는 풀어줬어. 검찰조사 후 상황이 완전히 뒤집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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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어. 160명이 입장할 수 있는 법정에 약 700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었어. 말자 씨는 피고인으로 노 씨와 나란히 서게 됐어. 말자 씨의 혐의는 중상해죄, 노 씨의 혀를 깨물어 말 못 하는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목이야. 그리고 노 씨의 혐의는, 특수 주거 침입과 특수 협박. 말자 씨네 집에 찾아가 식칼을 들고 난동을 부린 일 때문이야. 그런데, 뭐가 빠졌지? 검찰은 노 씨의 강간미수 혐의를 아예 빼버렸어. 노 씨가 강간하려던 게 아니라고 본 거야. 말자 씨의 변호인은 그동안 정당방위를 주장했어. 그런데 강간미수 혐의를 빼버리면? 성폭력 피해자의 자기방어가 아니라, 중상해 혐의만 남게 돼. 결국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뀌는 거야.

검사는 18살 말자 씨에게 소년법에 의해, 징역 장기 3년, 단기 1년을 구형해. 징역 3년 중 모범수로 인정되면 1년 만에 석방시켜 준다는 거야. 반면 노 씨에게는 징역 8개월을 구형했어. 검사는 말자 씨의 죄가 훨씬 더 무겁다고 본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계속됐어. 법정에서 말자 씨는 판사에게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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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피고인 노 씨에게 호감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피고인 노 씨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습니까?"

검사와 판사 외에도, 노 씨와 결혼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바로 말자 씨의 변호인. 말자 씨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인데, 그는 최종변론에서 이런 말을 했대.

"'총각 혀 자른 키스 사건'으로 노 군이나 최 양이 이미 다른 처녀, 총각과 혼인하긴 우리 사회 풍습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니, 본 변호인이 팔 걷고 나서서 양쪽 부모들로 하여금 한 번 더 마음을 돌리게 해서 노 군과 최 양의 혼인 중매에 나서겠다고 열변을 토해 만장의 방청객들의 격찬을 받았다."

말자 씨의 법익을 위해 나서야 할 변호인까지, 가해자랑 혼인하라고 강요한 거야. 그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박수치며 환호했대. 수백명이 들어선 법정 안에서, 말자 씨의 편은 하나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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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갑을 채워서 끌고 다니면서 그렇게 재판을 했어요.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살이 떨려요. 그때는 어리니까 시킨 대로 하라는 대로 했지만, 지금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그 어린 걸 끌고 다니면서 그 짓을 하고, 그렇게 만든 인간들. 살이 떨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근데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요. 못 잊어요."
-최말자

공판 때마다 몰리는 인파로, 최종 선고공판은 무기한 연기됐어. 그리고 이듬해 1월에 판사의 선고가 내려져. 말자 씨는 중상해죄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어. 재판부는 결국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어. 노 씨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그의 강간미수 혐의는 끝내 다뤄지지 않았어. 그 결과 성폭력 피해자인 말자 씨는 가해자인 노 씨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됐어.

그날 밤 말자 씨는 6개월 만에 구치소 문을 나서. 들어올 땐 여름이었는데, 나올 땐 한겨울이야. 구치소 밖에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버지는 결국 노 씨와 합의를 했다고 해. 논을 팔아 그 돈을 노 씨에게 준 거야. 어린 딸이 구치소에 있으니, 어떻게든 데리고 나오려 한 거지. 고소는 취하 됐지만, 처벌은 피할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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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만 벗겨지는 고무신. 그렇게 아버지의 등을 쫓아 반년 만에 돌아온 집.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쌀밥. 하지만 한 숟갈도 뜰 수가 없었대. 눈물이 흘러서 밥이 보이지 않더래.

"교도소에 있을 때는 나가서 쌀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어머니가 쌀밥을 한 그릇 갖다 주는데, 눈물이 나서 그 밥이 안 보여. 못 먹었어요. 그날 저녁에 밥 못 먹었어요."
-최말자

▲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났어. 18세 소녀는 어느새 칠순을 앞둔 할머니가 됐어. 할머니는 그렇게 담담히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놨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향희 씨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향희 씨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대.
꼬꼬무

"'아니 언니가 성폭력 피해자라며 근데 왜 감옥을 가?' 물으니 '저도 모릅니다. 근데 너무 억울합니다'… 딱 언니를 마주 봤는데, 진심이 전해진다 해야 하나. 갑자기 제 가슴이 그냥 확 먹먹하더라고요."
-윤향희, 최말자 할머니와 대학 동문

그 사건은 할머니의 삶에 깊은 화상처럼 남아있어. 구치소에서 나오고 얼마 후에, 할머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했어. 하지만 오래가진 못 했대. 그 사건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거든.

"23세에 결혼해서 26세에 혼자가 된 거죠. 그거는 꼬리가 물고 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안고 살아야 하는 거죠."
-최말자

그렇게 혼자가 된 할머니는 지금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 와이셔츠 공장, 가죽공장에 다니고, 튀김 장사, 빙수 장사에 옷 수선도 했어. 하지만 그날의 사건은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고 해. 친구, 동료,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50년이 훌쩍 지나, 처음 향희 씨에게 꺼내 놓은 거야.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이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이 한을 풀고 싶다'면서 이게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었어. 집으로 돌아온 향희 씨는,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해.
꼬꼬무

이 책이 대한민국 법원의 100년 역사를 정리한 법원사야. 여기에 '강제 키스 단설 사건' 이라며, 60년대를 대표하는 판결로, 최말자 할머니의 사건이 실려 있어. 법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는 사건이래. 형법 교과서에도 실린 사건으로,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는 거야. 할머니가 원하는 건,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바꾸는 거야. '난 죄가 없다. 가해자로 몰린 억울한 피해자다'라는 걸 인정받는 거야. 하지만 판결이 내려진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어. 이제 와서 바로잡는 걸 할 수 있을까.
꼬꼬무

"희망은 전혀 없었고. 너무 오래됐다는 거.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버렸다는 거. 그래서 소원을 이루어줄 수는 사실 없었어요. 그런데 너무 부당했고 너무 억울했고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물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바위를 뚫는다고. '그래 난 물방울 한 방울이 될 거야. 두드려볼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너무 부당하니까…. '언니 우리 한번 해보자. 근데 많이 힘들 거 같아' 하니 '저는 상관 없습니다. 회장님이 하신다고 하면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셨죠."
-윤향희, 최말자 할머니와 대학 동문

그렇게 두 사람은, 대한민국 사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의했어.

▲ 다시 시작된 싸움, 도움을 준 사람들

2018년 12월. 향희 씨는 할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두 사람이 문을 두드린 곳은 한국여성의전화. 여성 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 인권 단체야. 향희 씨는 나 혼자 힘만으로는 역부족인 걸 깨닫고 백방으로 알아보고 힘이 되어줄 곳을 찾았어.
꼬꼬무

"최말자 할머님을 사람들이 떠올릴 때 나이가 고령이고 성폭력 피해자고, 오랫동안 사법부에 대해 억울한 판결이 있었고 해서, 대개 힘이 없거나 하는 통념들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최말자 할머님은 당당하셨고.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셨고. 그래서 제가 느꼈던 첫 이미지는 힘 있고 강하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이때는 전 세계를 휩쓴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어. 고통 속에 침묵하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무렵이야.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여전히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침묵을 강요받아 온 사람이 많구나'라고 느끼셨대. 할머니가 바라는 것은 분명했어. '이 사건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도 할머니를 적극 돕기로 했어.

그리고 얼마 후, 한국여성의전화로부터 서류 하나가 전해졌어.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던, 판결문을 찾은 거야. 할머니는 판결문을 본 적도 없었대. 수십 년이 지나 처음 읽어보는 거야. 근데 이걸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라. 판결문에는 할머니를 유죄로 판결한 이유가 적혀 있었어.
꼬꼬무

"피고인 최말자가 본건 범행장소까지 간 것은 전혀 동녀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이고, 이것을 심리적으로 살핀다면. 사춘기에 있는 동녀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인 것으로도 인정할 수 있고. 이것은 결국 위 노ㅇㅇ으로 하여금 동녀가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동인으로 하여금 최말자에게 대담하게도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데 어느 정도의 보탬을 되었을 거라는 도의적 책임도 있는 것이다."
"범행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위에 들릴 수 있었다."
"혀만 집어넣었을 뿐이지 완전히 꼼짝을 못하게 한 건 아니지 않냐."

성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거야.

"참 그걸 어떻게 말을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판결문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말이 안 나왔죠. 누가 봐도 상식에도 안 맞고. 이건 도저히 이해 불가예요. 내가 가해자가 됐다는 걸, 그때 판결문을 보고 인지를 한 거죠."
-최말자

판결문에는 검사가 할머니를 윽박질렀던 내용들이 그대로 반영됐어. 심지어 "피고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다"는 문구도 있어. 실제 할머니 기억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야. 이미 확정된 판결에 오류가 있을 때 다시 심리를 해서 바로잡는 제도가 있지? 바로 재심. 한국여성의전화에선 재심을 맡아줄 변호사를 찾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어.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재심을 맡겠다는 변호사를 만난 거야.
꼬꼬무

"깜짝 놀란 거죠. '아니 이 사건의 피해자가 나타났단 말이야?' 평생 동안 사건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 재심까지 하겠다고 나타날 거라고는 아마 그 누구도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만나봐야죠. 피해자분을 모시고 우리 사무실에 오셨는데, 정말 기록 속에서만 보던 분이. 그 작은 체구에서 막 광채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을까. 작은 거인 같은 느낌이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나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고 더 이상 도리가 없다고 하는 게, 그건 우리 법조인 우리들의 도리가 아니겠냐."
-김수정, '혀 절단으로 방어한 성폭력 사건' 변호사

김수정 변호사는 100% 무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대신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했어. 이렇게 최말자 할머니 변호인단이 구성됐어.
꼬꼬무

▲ 재심청구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들

하지만 이들 앞엔 엄청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어. 재심은 '재심청구', '재심개시', '재심심판' 3단계로 진행돼. 법원에 재심 청구를 해서, 재심개시 결정을 받아야 해.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요건이 아주 엄격해. 재심을 청구해 개시될 확률은, 20.5%야. 그 후 재심심판을 거쳐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단 4%야.
꼬꼬무

대개 이럴 때 재심을 개시할 수 있어. 먼저, '기존 판결을 뒤집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경우' 또는 '판사 검사 경찰이 직무상 범죄를 저지른 경우'. 그럼 할머니의 경우는 어떨까?

재심 사유에 해당하는지 따져보려면,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해. 할머니 사건의 기록은 남아 있을까? 경찰청도,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서도, 검찰청도, 할머니가 갇혔던 부산 구치소도, 기록 확인이 불가능했어.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형사사건에 대한 기록은 보존 기간이 짧대. 모든 기록이 오래전에 폐기된 상황이야.

"기본적으로 기록이 있어야 되거든요. 근데 이 사건은 기록이 없잖아요. 근데 우리나라 재심 사건은 무죄를 주장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아니면 수사 기관의 처벌받을 만한 불법 행위가 있었다거나, 이런 게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아무것도 없어요."
-김수정 변호사

기록과 증거물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 재심 사유를 입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그런데 이 사건에는 확실한 증인이 있어. 바로 최말자 할머니 본인. 할머니는 오래전 그날의 일을 하루도 잊지 않았어. 아주 상세한 부분도 기억하고 있어. 김 변호사는 할머니의 진술에서 재심 사유를 찾기 시작했어.

할머니는 검찰청에 조사받으러 갔을 때 갑자기 수갑을 차고 구금 됐었잖아? 구속영장은 본 적도 없대. 할머니는 그때가 7월 초라 기억하고 있었어. 그런데 검찰이 정식으로 구속 기소한 날은 9월 1일이야. 할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검찰은 두 달 전부터 불법 구금을 한 거야.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강요했다거나,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와 혼인할 것을 강요했다거나. 심지어 순결성을 감정하고 공개하도록 했어. 법정에서 가해진 2차 가해는 당시 기사에도 기록돼 있어. 이는 검사나 판사가 '직무상 범죄를 저지른 경우'로, 재심 개시 요건에 해당될 수 있다고 봤어.

김 변호사는 할머니의 진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증거도 찾아냈어. "노 씨가 재판 끝나고 몇 달 후에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김 변호사는 고개를 갸웃 했어.
꼬꼬무

"혀 절단이 돼 가지고 평생 말 못 하는 불구가 됐는데 군대를 가? 이상한데? 막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김수정 변호사

바로 병무청에 사실을 조회했어. 노 씨가 1급 현역 입대했다는 기록을 찾아내. 심지어 월남 파병 후 만기 전역했다는 사실도 알아냈어. 노 씨를 아는 사람을 수소문해 들어보니, '걔 말 잘했어. 자세히 안 들으면 이상한 줄 몰라'라고 말해. 사건 당일 노 씨는 잘린 혀를 찾아 봉합 수술을 했대. 그런데 재판에선 노 씨가 말을 할 수 없는 언어 장애인이 됐다며 중상해죄로 처벌을 받았잖아. 만약에 그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어. 노 씨의 복무 기록과 주민들의 증언. 판결을 뒤집을 새로운 증거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5월 6일. 사건 이후 56년이 되는 날. 이날 최말자 할머니는 재심을 청구했어. 부산지방법원 앞에 많은 여성들이 모였어. 모두 최말자 할머니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이들은 한 목소리로 구호를 제창했어.
꼬꼬무

"56년 만에 미투! 재심으로 정의를!"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오랫동안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뻥하고 터져 나오는 거 같았대. 잠시 후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고 취재진 앞에 섰어. 할머니는 오랫동안 억눌러 있던 말을 꺼냈어.
꼬꼬무

"오늘 여기 여러 사람들이 제 가슴에 있는 한과 상처와 억울함을 다 풀어주셨기 때문에. 저는 크게 여기서 더 할 얘기는 없습니다만, 저의 억울함을 풀고 정당방위가 되어 무죄를 원합니다.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리 후손들한테는 이런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점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최말자 할머니

할머니는 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했어. 이제 첫걸음을 내딛은 거야. 2년 전 향희 씨 앞에서 털어놓은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이제, 많은 이들이 응원하고 지지하는 모두의 바람이 됐어. 법원은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을까?

법원은 재심청구를 기각했어. 변호인단이 제출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은 거야. 무죄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는 거지. 검사와 판사의 불법행위 역시 인정하지 않았어. 수사 기록과 재판 증거가 없으니 입증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런데 재심청구를 기각한다는 글보다, 할머니를 더 화나게 만드는 구절이 있었어.

"청구인에 대한 공소와 재판은 반세기 전에 오늘날과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여, 사회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재판부 법관들은 청구인의 재심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이러한 청구인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다란 울림과 영감을 줄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재판부
꼬꼬무

"나는 이 사건이 잘못됐으니까 바로 잡아달라고 한 것뿐인데. 뭐 반세기 세월이 흘러서 대한민국 법이 그때 법이나 지금 법이나 같은 법이고 같은 사람인데. 내가 장본인인데 내가 했는데. 내가 살았기 때문에 이 얘기를 해야지, 내가 죽었으면 다 묻힐 것 아닙니까?"
-최말자 할머니

재판부도 이 사건이 지금 일어났다면 죄가 되지 않았을 거라 인정했어. 하지만 지금의 잣대로 그때의 판결을 번복할 수 없다는 거야. 할머니는 "법의 가장 근본이 되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별도 못하는 우리 사법이 후세들에게 부끄럽습니다. 항고하겠습니다"라고 말했어.

즉시 항고하고 7개월 후, 항고심 결정이 내려졌어. "이 사건 즉시 항고를 기각한다"는 결과가 나왔어.

"2심은 바로잡겠지 이랬는데. 2심까지 결과가 그렇게 나오니까, 저희도 많이 힘들었는데. 제일 힘들었던 건 최말자 할머니시고…"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대법원에 재항고했어.
꼬꼬무

"절대 포기 못합니다. 나이 80에 얼마나 살겠어요?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 후대를 봐서라도 끝까지 싸워서 이 법 바로 잡고. 자기 인권 정당하게, 행복하게, 당당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끝까지 나는 지켜볼 겁니다."
-최말자 할머니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사건을 알리기 위해 더 노력했어. 전국 지방법원 앞에서 할머니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재심 개시 촉구 1인 시위에 나섰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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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할머니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야. 1,508명이 보낸 응원의 메시지.

모두들 온갖 노력을 했지만 대법원에선 아직 답이 없어. 해가 바뀌고 또 한 해가 갔는데도, 법원의 결정서는 오지 않아.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이, 할머니의 나이 어느덧 여든이야. 할머니는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탄원서를 대법원에 직접 써서 보냈어.
꼬꼬무

"이 사건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제 삶을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꽃도 피워보지도 못한 그 소녀의 삶은 평생을 살면서 억울했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시대 상황에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부끄러운 변명이 아니라 억울한 판결로 한 사람의 인생이 뒤집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정의로운 판단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제 사건의 재심을 다시 열어 명백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다시 정의하고, 정당방위를 인정하며 구시대적인 법기준을 바꿔야만 여성 성폭력 피해자들을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 더 이상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고 믿습니다. 국가는 나의 인권에 대한 책임을 보상해야 합니다."

▲ 61년 만의 재심, 최말자는 무죄다

2024년 12월. 대법원에 재항고한 지 3년이 훌쩍 넘은 어느 날. 김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한참 일하고 있던 시각. 갑자기 전화가 왔어. 어떤 기자에게서 온 전화인데, "재심청구 재항고 한 거요. 오늘 결과 나왔던데 보셨어요?"라고 묻는 전화야.
꼬꼬무

"대법원 게시판을 어제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안 올라와 있었는데, 전화받고 딱 봤더니 결정서 보냈다는 게 나온 거예요. 방에서 전화받고 '개시됐대!' '파기 환송됐대!'하고 만세 부르고 막 소리 지르니까 사람들이 전부 뭔 일 난 줄 알고."
-김수정, 재심 담당 변호사
꼬꼬무

"박수치고 춤추고 서로 끌어안고 난리가 났었죠."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꼬꼬무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어요. 비명이 나오더라고요."
-윤향희, 방송통신대학교 동문

재심청구를 기각했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거야. 대법원은 할머니의 일관된 진술에 귀를 기울였어. 불법 체포 구금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머니의 진술 외에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해서, 그게 할머니의 잘못이 아닌데 왜 불이익을 주냐. 할머니의 진술이 잘못됐다면 그걸 입증할 증거를 찾아와라, 그동안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거야. 파기환송 소식을 듣고 할머니는 "그래요? 당연히 그리돼야지요"라고 말했어.

얼마 전 7월 2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최말자 할머니의 재심 첫 공판이 열렸어. 유죄 판결 후 22,107일 만에 다시 열린 재판이야. 역사적인 그날. '꼬꼬무'가 할머니와 동행했어.
꼬꼬무
꼬꼬무
꼬꼬무

오전 11시 드디어 공판이 시작됐어. 20분 정도가 지나고 다시 법정 문이 열려. 공판이 막 끝난 거야.
꼬꼬무

"이겼습니다!"
꼬꼬무

"가장 의미 있는 장면 중의 하나는 검찰 측에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인 최말자 님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하고 정당방위를 인정하면서 무죄를 구형했다는 점입니다."
-김수정, 재심 담당 변호사
꼬꼬무

"분명히 제 귀로 들었습니다. 무죄라는 거, 사과하는 거, 분명히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니까 '대한민국 정의는 살아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말자 할머니

할머니는 판사 앞에서 이렇게 변론했어.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잊지 말아 달라고, 후손들이 성폭력 없는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법이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검찰은 최말자 할머니에게 고통과 아픔을 드린 것에 대해 깊이 사과했어. 그리고 정당방위를 인정하여 무죄를 구형했다고 해.

이제는 진짜 마지막 선고만 남겨뒀어. 지난 9월 10일. 드디어 할머니의 재심 최종 선고공판이 열렸어.
꼬꼬무

법원은 중상해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최말자 할머니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된다고 판단했어. 61년간 가해자로 살았던 최말자 할머니에게 2025년 9월 10일 무죄가 선고됐어.
꼬꼬무

2018년 향희 씨에게 털어놓은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7년이 지나 마침내 이루어졌어.
꼬꼬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왔지. 정말 저희 둘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61년을 거슬러서 용기를 낸 최말자 할머니에게 '참 잘했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그 한마디 해드리고 싶어요."
-윤향희, 최말자 할머니와 대학 동문
꼬꼬무

"나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손잡고 머리 숙이고 인사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너무 고맙잖아요. 참 좋은 인연을 만나서, 피가 섞였나 살이 섞였나.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서 여기까지 이렇게 나를 이끌어주고 도와주는데. 말로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내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인연입니다. 영원히 잊지 못하죠."
-최말자 할머니

멀리서 응원해 준 수많은 지지자들. 내일처럼 나서준 한국여성의전화와 김수정 변호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처음 시작할 때부터 늘 함께 한 향희 씨. 그래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어. "그럼에도 내 삶은 아름다웠다"라고.

할머니가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하는 취미활동이 있대. 바로 그림 그리기야. 이번에 재심 선고를 앞두고 할머니가 새로운 그림을 그리셨대.
꼬꼬무

공부하고 싶다는 첫 번째 소원을 이룬 어린 말자. 그리고 오래전 억울함을 풀고 무죄를 입증한 할머니. 둘의 소원이 이 그림에 담겨있어.
꼬꼬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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