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낸다고 합니다. 실력은 기본이고 운까지 따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선수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탁구 스타 왕하오입니다. 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국제대회 남자 단식을 제패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올림픽에서는 3회 연속 은메달에 그치며 진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에서 '천년간 2인자' 즉 '영원한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면 타법의 완성자, '백플릭'으로 한 시대 풍미

왕하오는 1983년 12월 중국 창춘시에서 태어났는데요, 키 175cm, 체중 78kg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를 가졌습니다. 1990년대를 빛냈던 류궈량과 공링훼이 시대가 저물어 가던 2000년대 초반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는 마린, 왕리친과 함께 중국 남자 트로이카로 불렸는데요, 중국식 펜홀더 전형을 사용하는 스타일로 흔히 '이면 타법의 완성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펜홀더는 세이크핸드 선수와 비해 일반적으로 라켓의 뒷면, 즉 이면을 이용한 공격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데요, 왕하오는 달랐습니다. 백핸드 드라이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파워도 대단했습니다. 특히 '백핸드 사이드스핀 플릭'이란 기술로 유명했습니다. 줄여서 '백핸드 플릭', 더 줄여서 '백플릭'이라고 하는데요, 손목을 이용해 회전을 주면 공이 마치 바나나처럼 빠르게 휘기 때문에 상대가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핸드 공격도 무척 잘했습니다. 또 임기응변과 전술도 뛰어나 27개월 연속 세계 랭킹 1위를 달렸습니다. 금메달만 해도 무척 많이 목에 걸었는데요, 올림픽 단체전에서 2개, 세계선수권 9개, 월드컵 3개, 아시안게임 4개, 아시아선수권 5개, 기타 국제대회에서 38개 등 숱한 금메달을 따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유승민의 천적이었지만 아테네 올림픽에서 충격패

왕하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노렸습니다. 당시 1번 시드는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인 장신의 왕리친인데 준결승에서 왕하오에게 졌습니다. 2번 시드의 마린은 스웨덴의 발트너에게 져 8강 진출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왕하오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왕하오는 상대 전적에서 유승민에게 6승 무패로 압도적 우세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금메달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왕하오가 결승전 상대인 유승민에게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으로 유승민의 승리였습니다. 대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하오에 대비해 치밀하게 전략을 짰고 김택수 코치와 함께 피나는 맞춤형 훈련을 한 결과였습니다.
유승민이 1988년 서울올림픽 유남규 이후 16년 만에 남자 단식 금메달을 따내자 한국에는 다시 탁구 열풍이 불었습니다. 왕하오도 덩달아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당시 왕하오는 팬클럽 회원만 1천 명이 넘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방한했을 때 뜨거운 사인공세를 받으며 유승민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유승민은 이후에도 왕하오에게 딱 1번 이겼습니다. 통산 전적에서 2승 18패로 절대 열세였지만 아테네 올림픽에서 1번 이긴 게 18번 진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통한의 은메달
한동안 실의에 빠진 왕하오는 자국에서 열리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반드시 금메달을 거머쥐겠다면 단단히 별렀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1년 전인 200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렸는데요, 이때 유승민을 4대 0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바르셀로나가 고향인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으로부터 트로피를 받은 왕하오는 세계 1위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베이징 올림픽 단식 금메달 후보 0순위로 꼽혔습니다. 탁구는 중국의 국기나 다름없고 오랫동안 세계 최강을 지켜왔습니다. 왕하오의 꿈은 자기 조국에서 처음 열리는 올림픽에서 당연히 단식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팀 동료 마린, 마린은 왕하오보다 3살 많은 당시 28살의 베테랑이었는데요, 까다로운 서브가 특기이고 번개 같은 포핸드 드라이브가 일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왕하오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마린은 노련한 플레이로 왕하오가 특기를 살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왕하오는 2게임 먼저 내주고 3번째 게임을 따냈지만 4번째, 5번째 게임에서 져 결국 4대 1 패배를 당했습니다. 2회 연속 은메달에 그친 왕하오는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올림픽 징크스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런던에서는 후배에게 패배, 3연속 은메달 불운

1980년대 1990년대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 떵샤오핑의 별명이 '부도옹', 즉 오뚝이인데요, 왕하오도 그랬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이듬해인 2009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식 결승에서 5살 많은 팀 동료 왕리친을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경기가 손에 꼽히는 명승부였는데요, 왕하오 탁구의 진수를 보여준 경기였습니다. 왕하오는 이 대회 복식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해 2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010년 월드컵에서는 팀 후배 장지커를 제치고 월드컵 세 번째 우승을 거두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장지커에게 번번이 발목을 잡혔습니다.
장지커는 1988년 생으로 왕하오보다 5살 어린 떠오르는 신예였습니다. 그리고 왕하오처럼 백핸드 기술이 화려한 데다 공격이 변화무쌍했고 그 속도가 엄청 빨랐습니다. 2011년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대회에서 왕하오를 잇따라 누르고 정상에 오르며 세대교체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관심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왕하오가 자신의 천적인 무서운 후배 장지커를 꺾을 수 있느냐에 쏠렸습니다. 새로운 최강자로 떠오른 장지커와 어느덧 30살을 눈앞에 둔 왕하오 두 선수가 결승에 올라 외나무다리 대결을 벌였는데요, 왕하오는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첫 게임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10대 10으로 듀스에 들어갔고 왕하오가 16대 15로 앞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뼈아픈 실수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6대 16에서 장지커가 그야말로 번개 같은 포핸드로 받아쳐 점수를 얻었습니다. 이어 왕하오의 서버를 절묘한 백플릭으로 응수했는데 왕하오가 받지 못해 결국 첫 게임을 18대 16으로 내주고 말았습니다. 왕하오는 2, 3게임을 내준 뒤 4번째 게임을 12대 10으로 따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5번째 게임에서 초반에 5대 0으로 앞서다가 듀스 끝에 졌는데요, 11대 11에서 왕하오가 백핸드 플릭을 시도하자 장지커가 번개 같은 백핸드 드라이브로 맞받아 친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왕하오는 13대 11로 져 결국 4대 1로 패배했습니다. 단식 금메달을 따낸 장지커는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격한 세리머니를 펼쳤고 3회 연속 은메달에 머문 왕하오는 허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내 지긋지긋한 올림픽 징크스에서 벌어나지 못한 왕하오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진한 눈물을 연신 흘려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번(2012년 런던 올림픽)이 저의 마지막 올림픽인 것 같습니다. 매우 좋은 올림픽이었는데요, 마지막 올림픽에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잘 찍은 것 같습니다.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내 매우 기쁩니다."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왕하오는 이듬해 2013년 세계탁구선수권에서 장지커에게 또 지며 4연패를 당했고 2014년 12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16년간의 대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왕하오는 올림픽에서도 2008년과 2012년 금메달은 따냈는데 모두 단체전 우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는 모두 단식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이 그에게 올림픽 단식 금메달만은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왕하오는 영원한 은메달리스트, 'Forever Silver'라고 불리게 됐는데요, 중국에서는 '천년간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천년간 2인자'라는 것이 쉽게 말해 영원한 2인자라는 것이지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