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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 500점→전설의 영어 강사→말하기 전문가' 가능했던 비결은… [스프]

[오프 더 모먼트] 이민호 (소통 전문가)

이민호 작가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이민호 (소통 전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관객 세 명뿐인 공연장에서 현실의 벽을 맛보며 도망쳤습니다. 무대가 그리웠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인디밴드를 꾸렸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생초보에서 팬카페가 생기고, 무대 헤드라이너가 되었지만 또 한 번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도전했습니다. 늘 맨땅에 계단을 한 칸씩 만들어 올라갔습니다. 1억 상금의 영어 강사 오디션 우승자에서, 연예인들의 말하기 선생님으로, 그리고 소통의 전문가로.

겉으로 보면 늘 화려한 무대 위를 걸어온 것 같지만, 그 뒤에는 '맨땅에 헤딩' 정신과 용기, 그리고 행동력이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모든 과정이 이를 악물고 버티는 싸움이 아니라 웃으며 즐기며 헤쳐 나가는 여정이었다는 겁니다. 이토록 오뚝이처럼 밝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건넨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품고 세상에 적정한 공감을 전하는 사람, 이민호 작가를 만나봅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독자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민호 작가
이민호(이하 이) : 안녕하세요. 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 이민호입니다.

장 :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이라, 소통 전문가로 딱 맞는 소개네요. 그런데 어린 시절 인생의 목표는 이런 이어주는 느낌과는 많이 달랐었다고요?

이 : 네, 주목받는 게 좋았어요. 연극배우가 꿈이었죠. 고등학교 때 우연히 연극부에 들어갔는데,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관객 시선을 받는 순간이 너무 좋더라고요. 창원 KBS홀에서 학교 축제를 했는데 관객들의 눈빛과 조명을 보며 '아, 나는 무대 체질이구나' 했어요.

장 :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나요? 반대하진 않으셨나요?

이 : 어머니는 "한번 해봐라" 하셨어요. 다만 제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걱정은 하셨을 테지만요.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준비했는데, 삼천포 시민회관에서 배우 9명, 관객 3명뿐인 공연을 하면서 현실의 벽을 느꼈어요. 그때 '내가 원하는 건 연극이 아니라 관심과 시선이구나'를 깨달았고, 이 길로는 어렵겠다 싶어 인생 첫 무대에서 도망쳤습니다.

장 : '도망쳤다'라고 표현을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 : 말 그대로 진짜 도망을 친 거니까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던 주변 단장님이나 연극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꿈꾸는 삶과 다르다는 걸 느끼고 "일단 서울로 가자"고 결심했어요. 그전까지 공부를 거의 안 하다가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찾았달까요?

장 : 서울에서는 어떤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나요?

이 :
의외로 다음 무대 역시 고향인 창원에서 시작됐어요.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니다 공익근무를 위해 다시 고향인 창원에 내려가게 됐고, 그 시기 내내 무대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밴드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맥이나 장비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어서 그냥 지역 밴드 구인·구직 사이트에 '밴드 하실 분 구합니다'라고 일단 올렸어요.

장 : 연락이 많이 왔나요?

이 :
고등학생 두 명이 왔더라고요(웃음). 저는 대학생이었지만, 저도 초보니까 일단 나이, 경력 안 따지고 팀을 만들었죠. 다만 기타를 잘 치는 제 친구 한 명을 꼬드겨서 어찌어찌 넷을 만들었고요.

장 : 그렇게 두 번째 무대가 시작됐군요. 실제로 '무대'에 선 건 언제였나요? 초보 밴드면 무대 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이 :
그게 에피소드가 재밌어요. 처음에 저는 록 페스티벌 같은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당연히 안 시켜주잖아요. 그래서 직접 전화를 돌렸어요. "돈 안 받아도 되니까 무대에만 세워달라"고요. 맨 처음에는 페스티벌에 전화를 돌렸어요. 당연히 다 거절당했죠. 그래서 살짝 낮춰서 대학 축제에 전화를 걸었죠.

장 : 무작정?

이 :
네, 무작정. 역시나 전부 다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고등학교들에 전화를 쭉 돌렸는데, 마침 마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허락해 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첫 공연이 성사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공연을 제 아내가 관객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결혼 후에야 알게 됐죠.

장 : 와, 뮤지션이 되진 않았어도 뭔가 꼭 갔어야만 했던 무대였나 싶기도 하네요. 인생에 거쳐야 할 순간이었나 싶기도 하고요. 이후로 몇 년이나 활동이 계속됐나요?

이 :
3년 정도 했고, 공연은 100번 이상 했어요. 첫 공연은 엉망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잘 된 부분이 있잖아요? 그 부분만 잘라서 영상을 만들어 홍보 자료로 돌리기도 하고, 또 다음 공연 비디오를 찍어서 거기서 잘하는 부분만 찾아내서 홍보하고, 그렇게 했지요. 그렇게 조금씩 공연을 늘려가다 보니 처음 밴드 만들 때 목표로 세운 걸 3년 안에 다 달성했어요.

장 : 목표가 뭐였나요?

이 :
첫째,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것. 둘째, 팬카페 회원을 2,000명 만드는 것.

장 : 와, 세상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나 봐요.

이 :
그렇진 않았던 것 같아요. 첫 공연 영상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거든요? 그때 얼마나 흥분했겠어요. 사람들 반응을 기대하면서요. 근데 댓글은 많았는데 칭찬보다 욕이 더 많았어요. 충격이었죠. 그런데 그 욕 중에도 잘 살펴보면 건설적인 피드백이 있었거든요. 그런 것 위주로 마음에 남겨서 계속 고쳐나갔고, 덕분에 3년 뒤에는 록 페스티벌 무대에도 섰고, 대학 축제에서도 메인 무대를 맡게 됐어요. '맨땅에 헤딩'이었던 만큼 성장도 빨랐던 것 같아요.

장 : 그런데도 밴드를 접게 된 이유는 뭐였나요?

이 :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데요. 당시 집이 다소 어려워져서 아버지가 환갑이 넘으신 나이에 야간 화물 운전을 하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운전하다가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중앙선을 넘어가 있더래요. '저렇게까지 힘들어하시면서도 일을 하시는데, 내가 이렇게 집안에 보탬이 안 되는 걸 계속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 : 그럼 밴드를 접은 뒤에 영어 강사의 길을 선택하신 건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나요?

이 :
네.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당시에 영어 강사 유수연 님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성공한 영어 강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마침 전공을 살려서 길을 만들어보자 마음먹었는데, 문제는 저는 그때 영어를 잘 못했어요. 토익도 500점대였거든요.

장 : 영문과 나오신 영어 강사 출신이라 원래 어학에 뛰어나신 줄 알았는데요!

이 :
아니에요. 서울로 대학을 가야지 하는 목표로 입시를 한 거고, 적성에 맞춘 느낌은 아니어서 당시에 학점도 다 C였어요. 그런데 영어를 본격적으로 하려 하니 귀인이 나타나시더라고요. 대학교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사무실 컴퓨터를 고쳐달라는 호출을 받고 갔다가 만난 캐나다인 교환교수님이 계셨는데, 밴드 음악 얘기로 친구가 됐거든요. 그분이 캐나다에 두 달 가는데 같이 가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따라갔죠.

장 : 그게 첫 해외 경험이었나요?

이 :
네, 첫 해외였죠. 막상 캐나다에 가니 말이 너무 안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무조건 공부해야겠다"는 절박함이 생겼죠. 학교에서 배우던 문법이나 '몇 형식' 이런 게 아니라, 사람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게 진짜라는 걸 알게 됐는데, 이 깨달음이 제 인생의 방향을 바꿔준 거죠.

장 : 이후에 영어 강사로는 어떻게 시작을 했나요?

이 :
저는 '무대가 높으면 계단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거든요. 큰 영어 학원이나 방송 무대에 바로 설 수는 없으니까, 무료 강의부터 시작해 보자 싶었죠. 그래서 캠퍼스 곳곳에 '무료로 영어 지도해 드립니다'라는 전단지를 붙였어요.

장 : 그 과정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이 :
너무 많죠. 무료 강의니까 그냥 들으러 왔다가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강의하실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면전에서 얘기를 듣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거든요. 첫 공연 영상을 욕먹으면서도 분석해 고쳤던 것처럼, 강의도 계속 개선했죠.

장 : 이렇게 하다 보니 기회가 더 넓어졌나요?

이 :
아니요. 이렇게 하면 최소한 학보사에는 실릴 줄 알았는데, 6개월을 해도 연락이 없는 거예요. 마음이 다소 지쳐가려고 할 때, 우연히 한 동국대 학우가 학보사에 제보를 해서 실리게 됐어요.

장 : 어떻게 그렇게 마음을 알고! 수업을 들었던 분이었나요?

이 :
아뇨, 저요. 저도 동국대 학우잖아요(웃음). 제가 저를 제보한 거죠. 기자님이 반신반의로 강의에 오셨다가, 인상적이었는지 실으셨어요. 이후 '캠퍼스 플러스'라는 잡지에 실리고, 다른 매체에도 조금씩 소개되면서 작은 강연, 강좌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장 : 그야말로 계단을 쌓아간 거네요. 그러다 결정적으로 계단이 아닌 에스컬레이터를 탄 계기가 있었다고요?

이 :
네. 어느 날 아침에 지인들한테 동시에 문자가 오는 거예요. '상금 1억 원, 영어 강사 오디션 참가자 모집'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재밌는 건 그 문자를 받는 중에 저도 이미 그 광고를 보고 있었어요. 그 순간 '이건 내 거다' 하는 직감이 들었죠.

장 : 역시나 바로 도전했군요?

이 :
아니요. 당시 한 유명 어학원에 강사 면접을 보고 합격해서 입사 제안을 받은 상태였어요. 혹시나 해서 여쭤봤죠. 그런데 단호히 말씀하시더군요. "방송 오디션에 나가면 우리 학원은 절대 못 온다"고요. 업계에서 '양다리 강사'는 안 좋게 보거든요. 그래서 안정적인 선택을 하려고 방송 오디션을 포기했죠.

장 : 그런데 결국 나가셨잖아요?

이 :
맞아요. 예선 날 마음이 심란해 산책을 하는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광화문 올레스퀘어에서 하는 예선전 현장으로 발이 가는 거예요. 준비도 안 하고,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는데.

장 : 반바지에 슬리퍼요? 그 상태로 오디션을 본 건가요?

이 :
아뇨. 물론 처음에는 그냥 구경만 하자는 마음이었어요. 현장을 지켜봤죠. 아리랑TV 아나운서, 외국에서 오래 산 참가자들, 영어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울면서 내려오는 사람도 있고… 그 생생함을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니 점점 가슴이 뛰더라고요. "이걸 안 하고 돌아가면, 나는 평생 오늘을 떠올리겠구나." 그래서 현장 스태프에게 "지금이라도 참가할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고, 임시 번호표를 받아 슬리퍼 차림으로 무대에 섰죠.

장 : 옷차림도 그렇지만 다른 준비도 채 안 된 상태였을 텐데, 우승을 하셨다는 게 놀라워요.

이 :
그렇죠. 사실 해외 생활은 1년 반도 안 됐고, 결승에 올라온 사람들은 10년 이상 외국에서 산 경우가 많았는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어 실력' 시험이 아니라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를 보는 무대였거든요. 저는 영어를 못하던 학습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디서 막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과거의 제 자신에게 설명하듯 수업을 진행했어요.

장 : 학습자 관점! 그게 통했군요.

이 :
네. 그리고 밴드 시절에 100회 넘게 무대에 선 경험 덕분에 긴장이 안 됐어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저한테는 공연 같았거든요. 결과적으로 그 경험이 우승의 토대가 됐죠.
이민호 작가
장 : 말씀을 듣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드네요. 첫째, '준비가 덜 돼도 주저 없이 기회를 잡아야 할 순간이 있다'는 것. 둘째, '모든 경험은 언젠가 연결된다'는 생각도요. 연극, 인디밴드, 무료 강의, 전단지 붙이기 같은 게 전혀 다른 경험 같지만, 다 합쳐져서 그 순간을 만든 거네요. 그리고 그 기저에는 '맨땅에 헤딩' 정신이 있고요.

이 :
맞아요. 저는 늘 무대가 높으면 계단을 만들고, 일단 한 칸을 올라갔어요. 한 칸이라도 올라가면 그다음 계단이 보이거든요.

장 : 그런데 저는 이런 용감함이 정말 신기할 정도로 보이거든요. 이렇게 여러 번의 도전과 변화를 거치면서도 계속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오신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
가장 큰 건 어머니의 말씀이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가 늘 찐한 경상도 억양으로 "늘 절겁게(즐겁게) 살아라, 절겁게"라고 하셨거든요. 어릴 적 저는 몸이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공부하라는 말 대신 그냥 즐겁게 살아가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즐겁게 살아라'를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셨어요. 형편이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늘 취미 생활을 즐기셨거든요. 테니스, 스킨스쿠버, 동창회 모임 회장 등 부유하진 않아도 일상 속에서 즐기는 순간을 만드셨죠. 그러다 보니 저는 남과 비교하는 법이 별로 없고, '어제보다 나아지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게 됐어요.

장 : 그 교육 방식이 지금 작가님의 성격에 깊이 스며든 것 같아요.

이 :
맞아요. 덕분에 무언가를 시작할 때 '재밌네, 하니까 되네'라는 마음으로 게임처럼 해요. 오히려 저는 불안을 자극하는 방식으로는 동기부여가 안 되더라고요. 서울로 대학 가겠다고 선언한 뒤, 서울대 다니는 동네 형에게 과외를 받게 됐는데 그 형이 첫 수업 때 '공부를 못하면 무시당하고 안 좋은 직업에서 힘들게 산다'는 요지로 겁을 주더라고요. 그때 저는 '열심히 해야지'가 아니라 "왜 저런 식으로 말하지?" 싶고, 하나도 통하지 않았어요.

장 :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참 많은 부모님이 '불안'을 자극해서 아이가 열심히 하게 하는 언어를 사용하잖아요. 저 역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커 와서, 오히려 작가님 부모님이 정말 '유니콘' 같으시다는 생각도 들어요. 작가님 어머니께서는 자녀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를 지혜롭게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결국 그 철학이 아들이 소통 전문가로 가는 행보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이 :
맞아요. 저는 원래 영어 강사로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가르치다 보니 '영어'라는 언어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한국어로도 제대로 '소통'을 할 줄 알아야 그걸 영어로 바꿨을 때 좋은 대화가 가능하잖아요. 문법·단어를 잘 알아도 대화를 구성하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죠. 그래서 학원에서 강의할 때도 어느 순간 사람 사이의 소통 방식에 더 집중해서 가르치게 됐고, 그러다 가끔 '이 내용은 학생들만 듣기엔 아깝다' 싶은 건 영상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그 영상을 보셨고, 그러다 TV 프로그램 〈말하는 대로〉 제작진이 저를 스피치 코치로 섭외하게 됐어요. 이후 세바시를 포함한 여러 프로그램 스피치를 코칭하며 본격적으로 소통을 연구하게 됐죠.

장 : 저도 영상들을 꽤 봤었어요. 당시 아주 많이 공유됐었죠. 다양한 영상 속에서 일관되게 느껴진 메시지는 '소통이란 간섭이나 평가가 아닌 적절한 방식의 메시징'이라는 거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영향이 묻어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자녀를 그렇게 키워오신 것 같고, 그 덕에 작가님이 오뚝이 같은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해오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작가님의 여러 저서 중에서도 《적정한 공감》이라는 책이 가장 와닿더라고요.

이 :
많은 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사실 '적정한 공감'이 소통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역설적으로, 저는 요즘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살다 보면 어떤 일에 감정적으로 확 반응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상태 때문일 때가 많거든요. 쉽게 예를 들어, 제가 나가려고 준비를 해요. 그런데 외투까지 미리 다 입고 아이들 준비시키고 물건 챙기다 보면 어느새 짜증이 확 올라올 때가 있어요. 그게 제가 몸에 열이 많아서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나는 열이 많다'라는 상태를 모른다면, 짜증의 원인을 무의식적으로 주변 상황 탓으로 돌리게 돼요. 하지만 지금은 "아, 이건 내 몸에 열이 올라서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죠. 그래서 저는 늘 현관 옆에 외투를 걸어두고, 진짜 나가기 직전에 입어요.

장 : 스스로를 잘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신 거네요. 그러고 보면, 다른 사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상태가 문제일 때가 많죠.

이 :
맞아요. 예전엔 "저 사람 문제다, 저건 고쳐야 한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면 "아, 내 상태가 지금 안 좋구나" 하고 먼저 봐요. 인스타 같은 걸 볼 때도 내가 여유롭고 기분 좋을 땐 응원하는 마음이 드는데, 마음이 지쳐 있으면 괜히 비판적인 생각이 먼저 올라오기 마련이거든요.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가 '내 상태'라는 거죠.

장 : 그래서 최근 대학원에서 명상심리상담을 전공하고 계셨던 거군요. 저는 또 다른 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네요.

이 :
네. 결국 소통을 위해서 중요한 건 내가 나의 상태를 바라보는 게 가장 우선이기 때문이에요. 최근엔 독서, 글쓰기, 명상 이 세 가지가 저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면, 내가 직접 만나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마주하게 돼요. '아, 다른 사람은 이렇게 느끼는구나' 하면서 시야가 넓어지죠. 글쓰기는 독자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게 만들어요. 쓰다 보면 나를 객관화하게 되고, '아,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를 알게 되죠. 그리고 명상은 하루 종일 내 욕구와 생각에 휩쓸려 있다가, 잠시 호흡에 집중하면서 "아,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 "이건 내가 뭔가를 너무 원해서 생긴 반응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해 줍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상대나 삶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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