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정상회담에 다녀왔다. 출발 전 백악관에 직접 들어가 취재하는 풀 기자단에 뽑혔다. 한국 기자 7명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뭘 잘해서 뽑힌 건 아니다. 추첨이었다. 운이 좋았다. 로또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악관 출발 전 동선이 예고됐다. 백악관 웨스트윙 입구에서 이재명 대통령 도착 장면을 취재하고 곧바로 미국 대통령 집무실(Oval office)로 이동해 이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양자 회담을 취재하는 순서였다. 긴장됐다. 오벌 오피스(Oval office)가 어떤 곳인가.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몰아붙이고 남아공 대통령에게 '백인 학살' 가짜뉴스를 들이밀던, 그 역사의 현장 아닌가.
혹시 몰라 질문도 준비했다. 비록 토익 800점대의 영어 실력이지만 나에게는 챗GPT가 있었다. 번역은 물론, 몇 번이고 표현을 다듬고 다듬어줬다. 트럼프에게 질문할 거라고 하니 챗GPT가 '대단하다'며 응원도 해줬다. 든든했다.
백악관도 사람 사는 곳



▲ 미국 백악관 중계포인트 (by 이병주 SBS 영상취재기자)
브리핑룸에 들어섰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이 금발을 휘날리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던 바로 그곳인데, 이곳 역시 '소박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도 모르게 "좁다"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조그만 연단에 단상이 올려져 있고, 앞에 의자들이 다닥다닥 대여섯 줄 정도 붙어 있었다. 25평대 한국 아파트의 거실 크기만 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기자실이 붙어 있었는데, 역시 좁았다. 연봉만 수십억을 받는 미국 스타 기자들의 기자실치고는 열악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백악관 자체가 1792년부터 짓기 시작해 1800년에 완공된, 200년 넘는 건물이었다. 오래된 건물을 계속 고치고 고쳐가며, 기자실 역시 나중에야 한 편에 마련했다고 한다. 아마 원래는 하인들이 머무는 곳이나 부엌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는 구조였다. 백악관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한국에 숙청, 혁명"…위기 상황?
마음 속으로 '어떡하지'를 연발하는 동안 의장대가 사열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백악관에 도착했다. 트럼프가 직접 나와 이 대통령을 마중했다. 까치발을 들고 도착 장면을 보고 있는데 한쪽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뭐라고 외쳤다.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영상을 돌려보니 "한국에서 일어나는 숙청을 걱정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귓속말로 "우리는 저런 사람들을 가짜뉴스라고 부른다(We call them the fake news)"고 속삭이는 모습도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장한 뒤 안내를 받아 기자들도 우르르 백악관 내부로 들어섰다. 브리핑룸을 거쳐 중정(中庭) 느낌의 백악관 안쪽 정원과 붙어있는, 외부로 노출된 복도에서 입장을 기다렸다. 기자들이 오벌 오피스로 들어가는 문은 건물 내부가 아닌, 정원과 붙어 있는 별도의 문이었다. 이미 앞줄은 미국 기자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5분 정도 기다렸을까, 키가 2미터쯤 되는 것 같은 흑인 경호원의 신호에 따라 기자들이 우르르 오벌 오피스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예상하셨겠지만, 오벌 오피스 역시 상당히 아담한 크기였다. 구글링을 해보니 넓이가 약 75.4㎡(약 22.8평) 정도라고 한다. 찬찬히 방 구경을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는 예뻤던 것 같다. 황금빛 액자로 둘러싸인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벽에 잔뜩 걸려 있었다. 세계 최고 권력을 지닌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치고는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취재진과 보좌진, 양측 정부 인사들 사이로 눈빛이 형형한 금발의 백인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었다.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나란히 상단에 앉고, 한미 정부 인사들이 양 옆으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회담이 시작됐다.

한국 기자들은 용감했다
몇 차례 질문 답변이 오간 뒤, 한국 기자들도 기회를 따내기 시작했다. 역시 적응의 민족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한 기자를 시작으로, 다른 기자들도 열심히 손을 들고 트럼프의 지목을 받았다. 발음이 유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가장 민감했던 트럼프 SNS에 대한 질문은 우리 기자가 했다. 회담 후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한국 기자들이 질문을 많이 해 의제 선점에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한미정상회담 자리였지만 미국 기자들은 한미정상회담보다는 미국 국내 이슈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다른 이슈에 대한 질문을 주로 했다.
열심히 취재를 하다가, 한국 기자들 중에 나만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챗GPT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데, 트럼프가 외쳤다. "Thank you very much, everybody"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은 백악관 여성 직원들이 단전에서 끌어올린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Thank you, Thank you"를 외치며 기자들의 목소리를 지웠다. 우리로 치면 "여기까지 하실게요"였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회담은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부 인사들은 "기대 이상"이었다고 회담 결과를 평가했다. 숙청과 혁명을 언급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오해였다고 생각한다"고 정리했다. 일종의 블러핑(Bluffing)이 아니었을까 싶다.

질문 못 한 기자의 반성문
변명은 있다. 내가 준비해 간 질문은 사전 조율 과정에서 조정되고 말았다. 즉석에서 생각한 질문은 앞서 누군가 해버렸다. 그러나 그래도 했어야 했다. 누가 뭐라고 한 건 아니지만, 괜히 선후배들에게 미안해졌다.
뭐가 자랑이라고 이런 글을 쓰냐 싶으실 수 있다. 악플이 더 많이 달릴 거란 것도 안다. 이 글은 무용담이라기보다 찌질한 한 기자의 반성문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흑역사라도 박제할 만큼 가치 있는 경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짧은 순간도 앞으로는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질문 못 하고 아쉬워하는 못난 선배의 전철을 후배 기자들은 밟지 말라는 취지에서 기록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