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춤추는 지휘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유튜브에서 '직캠' 영상이 입소문을 타면서 '유퀴즈'에도 출연했던 지휘자 백윤학 씨 얘기입니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바라보고 지휘하기 때문에 평소 관객들은 표정과 동작을 전면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백윤학 씨는 평소 지휘할 때 표정과 몸짓이 너무나 다채롭고 변화무쌍해서 단원들만 보기에는 아까웠던 모양입니다. 그를 전면에서 찍은 '지휘자 직캠' 영상이 올라오자 요즘 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그를 찍은 '직캠' 영상 중엔 수십만, 수백만 뷰를 기록한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백윤학 씨를 10여 년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시향 정명훈 음악감독이 첫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는데, 이때 참가한 신예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참가자 1번으로 나와 긴장한 채 브람스 교향곡 1번 1악장 앞부분을 지휘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당시 미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이후 귀국해 활동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만난 건 2013년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백윤학 씨를 기억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독특한 이력에 있습니다. 그는 과학고와 서울 공대를 다닌 엘리트 공학도였거든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음악가의 길로 인도했을까 궁금했는데, '춤추는 지휘자' 직캠을 보고 나니, 그가 정말 음악 하는 걸 좋아하고, 행복하게 음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잘했다고 합니다. 피아노를 배웠고 곧잘 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중학교 진학하면서 그만뒀습니다. 과학고 재학 중에는 취미로 연주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습니다.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부에 진학한 후에는 학내 동아리인 혼성합창단에서 활동하며 음악과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음대생은 아니지만 피아노를 꽤 친다는 이유로 선배들의 눈에 들었고, 전통적으로 음대생이 맡아 왔던 합창단 지휘자의 맥이 끊기자 그가 지휘자를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는 공대생의 '취미활동'입니다. 하지만 음악을 취미로 하는 것과 직업으로 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공학 전공을 살려 괜찮은 직업을 갖고 살면서 가끔 취미로 음악을 하자. 이게 일반적인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일반적인 궤도에서 이탈해 인생 항로를 송두리째 수정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포레의 레퀴엠을 연습하던 날이었어요. 되게 복합적인 감정이 찾아와서 울컥했던 거 같아요. 지휘하다가 눈물이 나더라고요. 눈물 나는 걸 가리고 했는데, 눈을 딱 떠보니까 다들 눈가가 촉촉했어요… 포레 레퀴엠은 천상의 소리만 계속 들리는 곡이거든요. 천상을 다 같이 한 번 갔다 와서 그런지, 지상의 것이 사소해져서 그런지, 그전까지는 뭔가 서로 긴장되고 감정도 날카로웠는데 그다음부터는 다 풀려서 잘했어요. 음악의 힘이었던 거 같아요."
음악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한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그는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몇 차례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자주, 주기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음대를 들락거리던 공대생은 음대로 편입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합니다. 인생 항로를 완전히 바꾸는 결정이 손쉬웠을 리는 없습니다. 부모님도 그의 얘기를 듣고 처음엔 완강히 반대했다고 하죠.
전기공학부를 졸업한 후 서울대 음대에 편입해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대학원도 졸업했습니다. 공학도 출신인 만큼, 그의 음악 공부는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좋은 소리'란 무엇인지, 어떻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늘 고민했고, 배움이 깊어지면서 그의 고민은 조금씩 풀렸습니다. '좋은 소리'를 음향학적으로 설명하고, 음악의 구조를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했습니다. 커티스 음악원에서는 학생들도 매주 무대 위에서 실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리허설 전에는 긴장해서 잠도 잘 이루지 못했고, 연주 후엔 녹화 영상을 보며 자신의 지휘 모습을 모니터했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봐야 했다'고 말하지만, 이후에도 영상으로 자신의 지휘를 점검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명문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했지만 그의 커리어가 처음부터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연줄도 없는 외국인이 미국에서 지휘자로 취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리가 나면 지원하고, 낙방하는 일이 계속됐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어, 1년 정도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템플대 대학원에 들어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오페라코치 과정을 공부한 후, 미국에서 오페라를 여러 편 지휘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 과정에 참가한 다음 해인 2014년, 영남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귀국했습니다.
영남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종종 서울시향, 부천시향, 대전시향 등을 지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세를 얻은 것은 서울페스타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영화 OST 공연 영상을 통해서입니다. 지난해 7월 공연 영상이 당시 160만 뷰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고, 올해 초 스브스 유튜브 채널과 인기 방송 예능프로그램인 '유퀴즈'에도 출연하면서 '춤추는 지휘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요즘 춤을 따로 배웠는지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곡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표정과 동작을 보면 그런 궁금증이 생길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춤을 배운 적도 없고, 춤을 추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많은 지휘자들이 춤추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어요. 첼리비다케라는 옛날 지휘자가 있는데, 지휘하는 걸 보면 진짜 웃으면서 춤추듯이 하거든요. 가끔 레슨 하다가 학생들이 너무 경직돼 있으면 선생님들이 일부러 춤을 막 춰 주시기도 하죠. 어떻게 보면 춤은 음악에 맞추는 건데 이건 동작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사실 원인 관계는 바뀌어 있죠. 그런데 결국은 박자 안에서 뭔가 이뤄지는 거라서, 지휘 자체가 춤이랑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지휘 전공생 시절부터 자신이 지휘하는 모습을 촬영해 모니터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고 했는데, '춤추는 지휘' 영상을 모니터할 때는 어떨까요?
"아내가 같이 볼 때, 좀 편하게 볼 때나 보지, 저도 잘 못 보겠어요. 사실은 '야, 이거 재밌긴 좀 재밌다!' 이런 생각은 들어요"(웃음)
'이웃집 토토로' OST를 연주할 때 그가 보여주는 다채로운 표정과 귀여운 동작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 영상 바로가기)
'산책'이라는 곡을 연주할 때는 실제로 팔을 흔들며 경쾌하게 걷는 동작을 합니다. (▶ 영상 바로가기)
(어느 순간 지휘자가 옆으로 빠지고 단원들을 차례로 클로즈업하는데,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기에 정말 좋은 영상입니다.)
예전 공연 영상을 보니, 일반적인 클래식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도 빠르고 신나는 춤곡이라면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보여주더라고요.
(▶ 2012년 수원시향 공연 영상 바로가기)
하지만 아무래도 대중적으로 친근한 영화음악을 연주할 때 '춤추는 지휘자'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이름에 '페스타'가 들어가 있는 만큼, 지휘자도 단원들도 그야말로 '축제'처럼 무대에 임합니다. 정해진 안무를 따라가는 춤이 아니기에, 그때그때 동작도 달라집니다.
"이런 음악들이 곡 자체로 보면 굉장히 단순하거든요. 단순하다고 나쁜 게 아니고 더 감동을 줄 수도 있는데, 어쨌든 학문적으로 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의 곡들인데, 할 때마다 정말 좋아요. 이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죠. 곡 자체가 좋은 것도 있고, 같이 하는 분들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고, 신나는 곡은 또 그날의 신나는 기분이 들어와 있기도 하고, 그래서 모든 곡을 할 때마다 매일 동작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백윤학 씨가 '춤추는 공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최근 더하우스콘서트 줄라이 페스티벌의 개막 공연 지휘를 맡아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현대음악과 실내악 연주도 하고, 한국에서는 거의 기회가 없었지만 오페라 지휘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사실 영화음악 콘서트는 그가 하는 활동의 일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음악회에 참석하고 즐길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디즈니 지브리 OST를 연주하니까 광고를 안 해도 오시는 거예요. 저희도 처음 이걸 할 때는 '클래식'이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이 보시기엔 이게 '클래식'인 거예요. 그러면 '이런 건 클래식 아니니까 이거 들으시고 나서 클래식은 또 다르게 들으세요' 얘기를 해야 하나? 그건 더 바보 같은 거예요.
이분들이 일단 오셨어요.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고 음악회장에도 앉아보고 조용히 계시다가 '인터미션'이라는 것도 한 번 경험해 봤어요. 이런 걸 아예 모르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저는 이 음악회를 처음 할 때는 이렇게까지 의미를 안 뒀는데 지금은 굉장히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마중물'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관객 분들이 굉장히 궁금해하시고, 연주에 또 오고 싶다고 하거든요."
앞으로 하고 싶은 연주를 물었더니, 바그너 오페라와 현대 음악을 이야기했습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 오페라인 '안내 프랑크의 일기'를 공연하고, 청소년들 대상으로 현대음악 연주를 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바그너 오페라든 현대음악이든, 조금만 알고 들으면 정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피아노 반주를 맡아 소규모로 바그너 오페라를 공연할 계획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수학 과학 공부도 중요하지만, 행복을 얘기하려면 예술 교육을 꼭 해야 한다'며 예술 교육에도 의지를 보였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