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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창피한 병' 인식이 대장항문질환 키운다

초고령사회, '창피한 병' 인식이 대장항문질환 키운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초고령사회에서 노인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한 노년'의 조건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죽기 전까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병원이 아닌 집에서 내 손과 발로 지내는 삶을 살고 싶다는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노년의 행복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배변 문제입니다.

노화와 함께 찾아오는 대장·항문질환은 자칫 개인의 존엄성을 해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직접적인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9.2%, 80세 이상은 4.6%에 달합니다.

세계에서 손꼽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셈입니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대장암, 치핵(치질), 변비, 변실금 같은 대장·항문질환의 유병률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노인 중에는 이런 질환을 '창피한 병'으로 여겨 숨기고 미루다가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대장암 검진을 꺼리는 이유로 '창피함'과 '공포'가 각각 4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질병은 더욱 고통스럽게 진화합니다.

고령 환자의 경우 대장·항문질환을 방치하면 응급 상황에 부닥칠 위험이 큽니다.

대변이 장에 쌓여 압박이 커지면 결국 장이 터지면서 감염을 일으키고 패혈증으로 악화해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대한대장항문학회 정순섭 이사장(이대목동병원 외과 교수)은 최근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가 개최한 미디어아카데미에 나와 "고령층 환자에게 대장·항문질환은 단순한 건강 문제가 아니라, 자립성과 품위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며 "치료를 미루지 말고 조기에 의료진과 상의하는 것이 존엄한 노후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변실금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남은 삶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질환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변을 지리거나 속옷에 변이 묻는 경험은 환자를 대인기피, 우울감, 심한 경우 고립으로까지 몰아넣습니다.

더구나 기저귀 사용이나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요양시설 입소 결정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학회에 따르면 국내 변실금 유병률은 65세 이상 인구에서 15%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었으니 약 150만 명가량이 변실금 증상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환자의 42.6%는 증상이 생긴 지 1년이 지나서야 병원을 처음 방문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들 환자는 사회 활동의 어려움으로 '외출이 어렵다'(32.7%), '냄새가 난다'(21.8%), '사회생활이 어렵다'(16.8%) 등을 꼽았습니다.

이는 변실금이 심리적 위축과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며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변실금은 식단 조절, 약물 치료, 배변 훈련, 바이오피드백 치료, 수술, 전기 자극치료 등으로 개선이 가능합니다.

설사가 원인이라면 섬유소를 많이 섭취하고, 설사를 일으킬 수 있는 음식(카페인, 술, 매운 음식, 우유 등)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골반 근육을 하루에 50∼100번 정도 조였다가 이완시키는 골반 근육운동을 병행하면 항문괄약근을 강화해 변실금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비교적 가벼운 질환으로 여겨지는 변비도 고령층에선 주의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수분 섭취 감소, 운동 부족, 노화로 인한 장 기능 저하 등이 변비를 부르지만, 노년기에는 여러 가지 약물을 복용하는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학회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노인들은 하루 평균 12.4개 이상의 약물을 먹고 있으며 이 중 70% 이상은 동일 효과의 중복 처방에 해당합니다.

여기에는 변비약도 자주 포함됩니다.

파킨슨병이나 치매 등에 사용되는 복합약물로 변비를 느끼면 즉시 변비약으로 대처하는 경향 탓이 큽니다.

그러나 변비약 남용은 되레 문제를 키울 수 있습니다.

변비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면 장 기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장내 미생물 균형을 파괴하고 인지 기능까지 떨어뜨릴 위험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학회의 지적입니다.

정 이사장은 "약국이나 온라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자극성 완하제를 무분별하게 복용할 경우 장운동이 더 떨어지는 '무기력 장'(cathartic colon)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면서 "이에 따라 변비가 심해지면 결국 장을 잘라내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했습니다.

노년기 대장·항문질환 중 가장 위험한 건 대장암입니다.

대장암은 1990년 후반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암입니다.

해마다 국내 암 발생률 2∼3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장암의 특징은 50대부터 발생률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해 70대에 정점을 찍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미국에서 최근 20여 년 동안 50세 이상의 대장암 발생률이 감소 추세로 돌아선 것과 다른 부분입니다.

전문가들은 대장암 예방을 위해서는 50세가 되면 꼭 대장내시경을 받아 용종이 있을 경우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용종은 장 점막의 일부가 주위 점막 표면보다 돌출해 마치 혹처럼 보이는 병변을 말합니다.

용종은 대부분 양성 종양이고, 그중 조직학적으로 '선종성 용종'이라 불리는 용종이 악성 종양, 즉 대장암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종성 용종은 대장암과 마찬가지로 50세 이상 연령, 동물성 지방 또는 포화 지방 섭취, 비만, 당뇨병, 흡연, 음주 등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또한, 대장암의 5%는 명확히 유전에 의해 발생하고, 약 5∼15%는 유전적 소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용종은 크기가 크거나 직장에 위치할 경우 혈변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증상이 없어 대장내시경검사로 진단합니다.

정 이사장은 "대장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장내시경만이 유일한 조기 진단 방법이자 즉시 제거할 수 있는 치료 수단"이라며 "대장암은 조기(1, 2기)에 발견하면 90% 이상이 완치할 수 있지만 고령층에서는 출혈이나 변비 등의 전형적인 증상보다 묵직함, 복통, 빈혈 등 비특이 증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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