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손지민 (사진작가)
인터뷰이 : 손지민 (사진작가)
"내 카메라가 원래 이렇게 무거웠었나?"
촉망받던 사진작가에게 찾아온 생각지 못한 삶의 변곡점. 손끝이, 팔이, 결국 전신이 말을 듣지 않던 어느 날, 온몸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목소리도 잃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아직 원인도 채 밝혀지지 않은 희귀병 M33.1. 완치 개념은 없고, 치료비는 한 달에 평균 천만 원 이상.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최신 기종의 카메라 장비를 사서 병실 침대 맡에 두고 매일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그것을 바라봤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오늘의 초대 손님, 사진작가 손지민 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았나요?" 그리고 "죽음의 경계에서 다시 돌아온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장재열(이하 장): 반갑습니다. 소개 부탁드릴게요.
손지민(이하 손): 2012년부터 사진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손지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장: 사실 상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걸어오신 분인데, 의외로 매체 노출은 그다지 원하지 않으셨었다고요?
손: 원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진작가는 사진으로 세상과 교감하면 되는데, 작가 본인에 대해 조명한다는 거는 선택적인 옵션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병과 함께 살아오면서 삶에 대한 시선이나 관점이 변화하기도 했고, 제 자신이 꼭 사진이 아니어도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 그렇군요. 오늘은 말씀 주신 대로 사진작가로서의 이야기를 넘어서 지민 님 인생의 아주 깊은 굴곡과 회복의 과정을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어릴 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손: 어릴 때는 호기심이 정말 많았고, 왕오타쿠였던 것 같기도 해요(웃음). 초등학교 때는 만화책을 수십 권씩 쌓아 놓고 친구들한테 100원씩 받고 빌려주는, 요즘으로 치면 만화 대여업이랄까요? 그런 것도 하고, 수행평가로 장구벌레 관찰하는 게 있길래 왕창 잡아서 장구벌레 판매업을 하기도 했고요(웃음). 중학교 때부터는 코스튬플레이를 하면서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또 제가 '세일러문' 캐릭터 중에 세일러 우라누스 팬클럽 회장도 했었어요. 팬픽을 쓰고, 굿즈도 만들고, 코스프레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무언가 만들어 내는 걸 좋아하게 됐던 것 같아요.
장: 그 시절에 이미 창업도 여러 번 하시고 창작의 즐거움을 알고 계시고… 보통내기가 아니었군요. 그러다 어떻게 미술 쪽으로 진로를 정하신 건가요?
손: 한참 열심히 코스프레도 하고 팬클럽 회장도 하다가, 세일러문 애니메이션 전체 팬클럽 총회장 언니가 갑자기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 대형 사건이 있었어요. 덕후 생활을 청산해 버린 거죠. 그 여파로 우후죽순 산하 팬클럽 회장인 중·고교 청소년들이 갈피를 못 잡고 와해돼 버렸죠. 그래도 그때 경험이 남아서 자연스레 표현 욕구로 발현됐는지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미대 입시 준비를 했어요. 매일같이 미술학원에 다니고, 나름 즐겁게 시간을 보내긴 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어요. 재수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미대 입시 준비하면 수능을 치고 나서 다른 친구들은 다 노는데 그때부터 아침 8시 미술학원 가서 밤 10시까지 입시 미술을 하거든요. 그걸 다시 할 엄두가 도저히 안 났어요. 그래서 그냥 일반 문과로 방향을 틀었고,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게 되었죠.
장: 문창과에 다니면서 사진으로 관심사가 옮겨가게 된 계기는 뭔가요?
손: 우연히 교양으로 사진과 수업을 듣게 됐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바로 옆 건물이 사진학과 건물이었거든요. 그냥 한 번 찍어 보자 했던 게, 점점 빠져들게 됐어요. 글과 그림, 사진을 하나로 엮는 작업을 해보기도 했고요. 그때 만든 작업으로 캐논코리아에서 주관하는 사진 장학생 모집에 지원했는데, 세상에, 붙은 거예요. 전국의 사진 전공 대학생 중 딱 여섯 명을 뽑아서 장학금도 주고, 전시회도 열어주고, 구본창 선생님 같은 당대 최고의 사진작가 여섯 분과 1:1로 매칭해 가르침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다들 선망하는 등용문 중 하나인데요. 뜻밖에도 사진을 갓 찍기 시작했을 때쯤에 그 최종 여섯 명 안에 든 거죠.
장: 엄청나게 재능이 뛰어난 거였을까요?
손: 그것보다는 당시 복합예술로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선정된 사람은 저 혼자이기도 했고요. 복합예술이란 게 아주 거창한 의미는 아니고 사진에다가 거기에 어울리는 짧은 시와 드로잉 같은 것을 얹기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을 다 넣었거든요. 이미지와 텍스트, 감정이 서로를 어우르는 방식으로 구성한 거죠.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들었어요.
장: 미술을 하다가 접고, 문예창작을 하다가 그만두었지만 그 모든 과정들이 버려진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의 존재감을 만들어 준 재료가 된 거군요.
손: 저는 그런데 미술을 접었다, 문예창작을 그만두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 같은 창작의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이전에 팬픽 쓰고 코스프레하고 그런 것들도 부끄럽지 않거든요. 그 시절부터의 모든 게 다 저의 요소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뭐든지 '어? 재미있겠다' 싶으면 해 봤던 것 같아요. 다 쓰이니까.
장: 그런 성향 때문일까요? 이후에 바로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신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또 다양한 경험을 쌓으셨다고요.
손: 맞아요. 해외 취업을 하게 됐어요. 제가 취준생이던 시절이 해외 취업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였고, 저도 마침 대학생 때 해외 인턴십을 했던 인연이 있었거든요. 여러 경험을 쌓다가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샌즈 미술관에서 일을 하면서 정착을 하게 되나 싶었어요. 급여도 좋고 안정적인 직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도 모르게 제가 사진 활동하던 시절의 옛 클라이언트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더라고요.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해외 촬영하실 일 있으면 저를 써라, 인근 동남아 국가로 오시게 되면 거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가서 사진을 찍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그때 생각했죠.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 나는 돈을 더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진 작업이 다시 하고 싶은 사람이구나. 나는 표현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2012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장: 그 시기가 20대 후반 정도였나요? 업계에서 꽤 빠른 나이에 성취를 이루었다고 들었어요.
손: 네, 좋은 기회도 있었고요. 당시에 친한 선배가 신사동의 사진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권리금 없이 줄 테니 해볼래?"라고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권리금 없는 게 엄청 큰 메리트 같아서 덥석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제가 사업자가 되기 전엔 몰랐어요. 한 달이 엄청 빨리 돌아오더라고요. 신사동 월세는 어마어마한데, 저는 여전히 어려서 클라이언트들이 오면 반말로 "실장님은 어디 계시니?"라고 할 정도로 앳된 모습이었거든요. 제가 실장인데. 그래서 그냥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일을 주면 그냥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렇게 안 가리고 일을 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소문이 나서 삼성전자 같은 대형 클라이언트들과 작업이 계속 이어지고, 배우 우에노 주리, 빅뱅 탑 같은 셀럽들의 사진을 작업할 기회도 늘어나면서 조금씩 상업적으로도 안정됐죠. 이후에 스위스나 독일 같은 해외 비엔날레나 아트페어에서도 작품이 인정받으면서 또래들보다 좀 빠르게 업계에 안착을 하게 됐고요.
장: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찾아온 불청객이 있었죠? 희귀 난치병 진단을 받으셨다고요.
손: 첫 불청객은 전세사기였고요(웃음). 인생에서 일들이 막 몰려오는 시기가 있잖아요. 처음에 전세사기로 사회초년생으로서는 거의 전 재산에 가까운 큰돈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다음에 아버지께서 암 투병을 하시게 돼서 계시는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사진 일이 좀 끊어졌다 보니까 부산의 한 기업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했는데, 하필이면 글로벌 사업을 하는 곳이라 코로나 때 바로 폐업해서 다시 실직자가 되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런 인생의 순간들이 좀 다 지나가고, 홀로 되신 어머니도 좀 곁에서 돌봐드린 뒤에 '이제 다시 서울 가자!' 할 때 즈음에 병이 찾아왔어요. 전 세계에서 제가 알기로는 10만 명당 5명 이하로 겪는 아주 드문 병이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처음엔 병인지도 몰랐어요.
장: 그럼 처음에는 어떻게 몸에 이상이 생긴 줄 알게 되셨나요?
손: 맨 처음에는 손가락 끝이 좀 욱신거리는 정도였다가 며칠 뒤에는 '카메라가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하고 의아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점점 팔에 힘이 안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촬영 중에 말 그대로 철퍼덕 쓰러졌어요. 순식간에 몸에 힘이 안 들어가면서 쾅! 소리가 나게 넘어졌어요. 얼굴부터 그대로 그냥 바닥에 갈려버렸죠. 일어나려 해도 안 되고, 그날부터 말 그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죠. 아예 팔다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장: 그 정도 심각한 상태였군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냥 넘긴 건가요?
손: 아니요. 병원을 다섯 군데 넘게 갔는데도 "겨울이라 추워서 그런가?" 같은 말만 들었어요. 그러다 정말 상태가 심각해져서 대학병원을 갔죠. 그랬더니 "너무 늦게 오셨어요. 암 말기보다 더 심각한 상태예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내가 병원을 안 다닌 게 아닌데, 다 모르겠다더니 이제 와서 너무 늦었대요. 결국 '피부근염 M33.1'이라는 희귀질환으로 진단받았어요. 이 병은 근육과 피부가 서서히 망가지는 자가면역 질환이에요. 루게릭과도 일견 비슷하지만 자가면역 질환이라 면역체계가 내 몸을 공격할 대상으로 인식해 악화되면 호흡에 필요한 근육이나 심장 근육까지 영향을 주거든요. 생명과 직결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해요.
장: 심장 근육이나 숨 쉬는 근육까지요?
손: 그렇죠. 생각보다 몸의 온갖 곳이 다 근육이거든요. 제일 먼저 손발이 안 움직이고, 그다음에 목을 가눌 수도 없어져서… 왜 신생아들 보면 자기 목을 못 가누잖아요? 그렇게 돼서 하루 종일 소파에 목을 기대고 있어야 했고요. 숟가락 하나 당연히 들 수 없고. 입원 전까지는 필사적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성대 근육 소실되기 전에, 죽기 전에 친구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요. 이제 대화를 조만간 못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니까 마음이 너무 바빴죠. 그때 한 친구는 병원 입원 대기 기다리는 저의 호텔에 매일 아침 찾아와서 같이 조식을 먹고 돌아가 주고, 또 한 친구는 "예술가라 병도 레어한 거 걸린다"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오히려 그게 참 많은 도움이 됐어요.

장: 그 덕분에 슬픔이 좀 덜어졌겠어요.
손: 근데 사실 슬퍼할 겨를이 딱히 없었어요. 오히려 입원하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일 어떻게 하지?"였거든요. 제가 부산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맙게도 클라이언트들이 다시 많이들 저에게 일을 주시면서 진행 중인 대형 프로젝트가 많았거든요.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클라이언트는 제가 병원에 있든 말든 프로젝트는 진행돼야 하는 거잖아요. 아픈 건 제 사정이고 프로젝트와는 관계없잖아요. "내가 아픈 걸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 피해 보면서까지 이해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없더라고요. 그래서 병원 침대에서 직원들에게 음성으로 디렉션을 주면서 일했어요. 팀원들이 촬영한 걸 실시간으로 공유받고, 제가 확인하고 목소리로 수정 지시하고. 말하자면 아바타처럼 일한 거죠. 몸은 안 움직여도 목소리는 아직 나오니까.
장: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몸이 더 상하거나 병이 더 악화되진 않았나요? 옆에서 간병하시는 어머니도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고요.
손: 그런데 오히려 저는 제 생각에 너무 빠질 겨를이 없어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생각해요. 맨 처음에는 5년 이상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는 소견을 들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슬픔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요. 아, 그리고 회복할 수 있었던 팁이 하나 더 있었어요.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그때 당장 사용할 수도 없는 가장 최신 기종의 카메라를 큰마음 먹고 하나 샀어요. 환자용 식탁 있잖아요, 침대에 붙어 있는. 거기에 그걸 올려두고 매일 쳐다보면서 그냥 생각을 했어요. '어, 나 저거 다시 들고 현장에 나갈 거야.' 그렇게 그냥 매일 생각했어요. 병이 호전되다가도 어떤 날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정말 손발이 너무 아파서 차라리 손발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나빠지기도 하거든요. 그렇지만 그냥 그 통증에 함몰되기보다는 '나 저거 들고 다시 현장 갈 거니까 조금씩 움직여 보자.'라고 생각하고 매일 딱 1m씩 움직였어요. 매일매일. 그게 어느 날 100m가 되고, 200m가 되더라고요.
장: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가 두 배로 대단하게 들린 게, 사실 이 병이 치료비가 엄청나게 많이 드는 병이라고 들었거든요. 물론 마인드셋 자체로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돈이 물 새듯이 나가는 와중에 카메라를 새로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손: 그냥 샀어요. 나는 나을 거고, 벌면 되니까(웃음). 사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긴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긴 했어요. 주사 한 번에 600만 원이고, 처음에는 치료에 차도가 너무 없어서 그 주사를 매달 맞았거든요. 게다가 서울대병원에 한시가 빨리 입원해야 하는데 병실이 안 나와서 초반엔 일단 살아야 하니까 특실을 잡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병은 완치 개념이 없는데, 처음에는 생명 유지 비용으로 한 달에 1천만 원이 족히 넘는 치료비가 나간 거긴 하죠.
장: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너무 살 떨리고 불안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손: 그렇기도 했지만 제일 많이 한 생각은 '아, 돈은 이럴 때 쓰라고 버는 거구나.'였던 것 같아요. 이렇게 내 인생의 위기 때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거구나. 사치하고 놀고 그런 게 아니라.
장: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남다른 마음가짐으로 정말 드문 케이스라고 할 만큼 두드러진 회복을 해내셨어요. 이후에 바로 작업을 시작했겠군요?
손: 사실 병실에서도 작업을 하긴 했는데, 목소리로.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 다시 직접 사진기를 들었죠. 그냥 그 자체로도 너무 좋더라고요. 커리어적으로 중단하지 않고 잘 버텨준 덕인지 오히려 성장의 계기도 있었던 게,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글로벌 아티스트로 뽑혀서 스위스 아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 프리즈 런던 등의 아트페어와 비엔날레에 참여를 하게 됐어요.

장: 저는 그런 곳에 참여하면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버는 줄 알고, '아, 작가님이 거기서 다시 치료비로 쓴 것들을 만회하셨겠구나'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면서요? 오히려 다른 재미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손: 아, 맞아요. 스위스에 체류할 때 숙소 근처에 디올 팝업스토어가 생겼더라고요. 당시에는 전시 중이어서 정신없이 그냥 지나치기만 하다가 전시 끝나고 여유가 생겨서 구경을 좀 하게 됐죠. 그런데 그냥 딱 생각이 난 거예요. "이 예쁜 디올을 구경만 하지 말고 여기랑 일을 해볼까?"
장: 아니, "일하고 싶다"가 아니라 "일해볼까?"라고요?
손: 네. 그냥 해보자 싶어서 디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고객센터 전화번호 있길래 거기로 전화를 걸었어요. 디올 파리 본사 고객센터로요. 그리고는 말을 한 거죠. "나 한국 정부에서 선정되어서 여기 전시하러 온 사진작가인데, 디올이랑 같이 작업하고 싶다."
장: 고객센터요? AS 문의하는 그 고객센터요?
손: 네. 그냥 안 되면 마는 거니까, 잘못되는 거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얘기를 했죠. 마케팅팀에 연결해 주면 고맙겠다고요. 그런데 연결이 되고, 포트폴리오 좀 보자고 하더라고요. 결국 디올 크루즈 컬렉션 사진을 찍게 됐죠.
장: 지금 생각하면 그 시도가 지민 님 인생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것 같아요.
손: 맞아요. 병을 앓고 나서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저는 지금 멀쩡해 보이지만, 이러다가 또 하루이틀 사이에 훅 진행돼서 다시 몸을 못 가눌 수도 있고, 알 수 없거든요. 그래서 그냥 뭐든지 해보게 된 거죠.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서 정말 절감을 하게 됐고, 그러니까 생각이나 고민에 더 시간을 안 쓰고 싶은 거죠. 그냥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시도를 하자. 이렇게 되었고, 또 한 가지 변화가 제가 병을 앓기 전에는 되게 일 중심적인 사람이었거든요. 냉정한 편이기도 했어요. 아픈 사람들을 아예 이해하지 못했고, 아파서 일 못 나온다는 사람에게 '핑계 대지 마라. 그럴 거면 빠지라'고 말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병을 겪고 나서야 시선이 넓어진 거죠.
장: 그래서 또 하나의 그냥 도전, 뭐든지 해본 변화가 있었다고요.
손: 네. 가을 학기부터 뉴욕대학교 대학원 심리학 박사 과정에 진학해요. 예술심리치료를 연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생겼거든요. 내가 예전에는 저 자신을 위해서 예술을 했다면, 이제는 제 예술이 누군가를 밝히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저처럼 희귀한 병을 앓거나, 그게 아니어도 마음의 깊은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제 사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장: 마지막으로 공식 질문 드리는데요, 요즘 가장 마음에 쓰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