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산 고가도로 옹벽 붕괴 사고
인재로 인해 수많은 희생을 겪고 나서야 '후회와 한탄'이 뒤따르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됐습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2일 오후 3시 기준으로 지난 16일부터 닷새 동안 전국을 삼킨 폭우로 19명이 숨지고 9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시간당 100㎜가 넘게 퍼붓는 극한호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안일한 대처로 피해를 키운 게 드러났습니다.
이번 폭우와 관련해 첫 인명피해는 지난 16일 오후 7시 4분 경기도 오산의 옹벽 붕괴 사고에서 나왔습니다.
행정기관의 관리 부실·미흡한 대처가 피해를 키운 전형적인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사고 발생 전 한 시민이 옹벽 붕괴 위험 징후를 발견해 미리 알렸으나 제대로 된 대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옹벽이 무너지기 약 36시간 전인 15일 오전 7시 19분 오산시 도로과에 도로 붕괴가 우려된다는 민원이 제기됐습니다.
민원인은 "2차로 오른쪽 부분 지반이 침하하고 있다. 빗물 침투 시 붕괴가 우려된다"며 "보강토로 도로를 높였던 부분인 만큼 조속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제보했습니다.
민원 내용이 구체적이고 전문적이었으며, 친절하게 주소와 옹벽 사진까지 보내줬지만 즉각적인 대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산시는 도로 파임현상(포트홀)에 따른 고가도로 통행은 차단했지만, 정작 민원인이 우려한 옹벽 붕괴 위험 제보는 간과했습니다.
결국 10m 높이 옹벽이 무너지면서 바로 옆 도로 위 차량을 덮쳐 40대 남성 1명이 숨졌습니다.
이권재 오산시장은 이에 대해 "도로상에 포트홀이 생기면 차가 달리면서 위험할 수 있으니 교통 통제를 한 건데, 옹벽이 무너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전담팀을 구성해 이번 사고를 수사중인 경기 남부경찰청은 압수물 분석을 통해 공사 단계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그동안 매뉴얼에 맞게 정비가 이뤄졌는지, 사고 위험이 사전에 감지됐는지 여부 등을 살펴볼 계획입니다.
지난 17일 발생한 대구 북구 노곡동 침수 사고도 15년 전 침수와 마찬가지로 인재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호우경보가 내려진 상황에서 저지대인 노곡동 일대가 침수될 당시 빗물 펌프장의 수문이 닫혀 있었고, 배수펌프에 유입되는 부유물을 골라내는 기계도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된 것입니다.
당시 금호강 수위는 배수펌프가 작동할 정도로 높지 않아 수문이 열린 상태에서 자연 배수가 이뤄졌어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펌프장 수문 2개 중 1개가 닫힌 상태였습니다.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주택 4채와 차량 40대 등이 잠겼고, 주민 26명은 구명보트를 타고 급히 대피해야 했습니다.
노곡동 일대는 15년 전인 2010년 7월에도 2차례 침수됐는데, 당시에도 배수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대구시는 "원인조사가 끝나는 대로 종합개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인재 추정 사고는 충남 서산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청지천이 범람해 주변 도로가 물에 잠겼다는 신고가 처음 접수된 시각은 지난 17일 오전 3시 59분이었는데 도로에는 이미 차량 8대가 고립돼 있었습니다.
서산시는 그보다 앞선 3시 17분 '청지천 범람이 우려되니 주민들은 안전한 고지대 등으로 대피해 달라'는 재난문자에 이어 오전 3시 36분 '대부분 도로가 침수됐으니 차량 운행을 자제하고 가급적 외출을 삼가달라'고 재차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청지천 주변 도로 진입이 완전히 통제된 시간은 오전 6시 30분이었습니다.
차량 침수 신고가 들어온 지 2시간 30분, 대피 재난 문자를 보낸 지 3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사이 차량은 계속 진입했고, 결국 사망 피해도 나왔습니다.
소방당국은 오전 5시 14분 차량 운전자 3명을 구조한 데 이어 오전 6시 15분 다른 차량에서 심정지 상태의 A(60)씨를 발견했으나 결국 숨졌습니다.
오전 11시 25분에는 물에 빠져 숨져 있던 B(83)씨도 발견됐습니다.
이 사고와 관련해 이재명 대통령은 당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관리 미흡으로 인한 인재가 아니었는지 면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서산시는 "지역 전역에 동시다발로 피해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도로를 차단할 여력이 없었다"며 "중단된 청지천 정비사업을 신속하게 재개할 것을 충남도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수해로 인한 피해를 너무 쉽게 망각하면서 이같은 피해가 매년 반복된다는 전문가 지적이 나옵니다.
문현철 재난관리학회 부회장은 "호우 재난의 가장 큰 특징은 최소 하루 전에 예보가 된다"며 "재난안전관리기본법이 정한 재난안전관리위원회를 총리·장관→광역단체→기초단체가 수시로 개최하면서 재난에 대비하는 것을 체득·학습하면 실제 재난대책본부(재대본)가 가동될 때 대응력이 한결 좋아질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오산 시장이 재난안전관리위원회를 통해 재난 대비를 체득했다면 재대본이 가동됐을 때 이런 위험요소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재난안전기본법에서 정한 대비 시스템이 왜 즉각 작동하지 않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고 진단했습니다.
문 부회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이런 피해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수해로 인한 피해를 너무 쉽게 망각한다"며 "공무원들은 시설·장비·인력 탓으로 넘기는 관행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