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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얼굴을 한 우리 주변의 괴물…오정세, 새로운 악인의 완성 [스프]

[주즐레]

주즐레(SBS 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기대해.. 오늘 아주 인상적인 날이 될 테니까."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끔찍한 폭탄테러를 앞두고 조용히 내뱉은 말. 상처로 찢어지고 짓눌린 얼굴의 오정세는 낡은 건물 위 난간에 위태롭게 앉아 이런 섬뜩한 말을 서늘한 미소와 함께 읊조렸다. 오정세의 얼굴에선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승재도, '극한직업'의 테드창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도, '스토브리그'의 권경민도,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상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정세가 '굿보이'의 민주영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가면을 썼다.
오정세

오정세는 지난 20일 종영한 JTBC 드라마 '굿보이'(극본 이대일, 연출 심나연)에서 민주영 역을 열연했다. 민주영은 낮에는 평범한 관세청 공무원으로 활동하지만, 밤에는 밀수, 마약 등 온갖 범죄로 지하경제를 주도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인과 폭력을 자행하는 캐릭터다. 특채로 경찰이 된 5인의 국가대표 메달리스트들이 '굿보이'가 되어 범죄를 소탕할 때, 그 반대편의 '배드보이'로 끊임없이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최종 빌런'이다.

오정세는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의 매력보단, '굿보이'들이 뭉쳐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굿보이' 대본이 재미있었던 포인트는 민주영의 매력이 아니었어요. 윤동주(박보검 분)와 선수들을 모아 만든 굿보이 팀이 각자의 기술을 써서 악을 응징하는 이야기 구조가 흥미로웠고, 굿보이 팀을 응원하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작품이 하고 싶었어요. 제가 맡은 건 빌런이지만, 민주영을 어떻게 그려야 이 세계에 자극제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죠."

1997년 데뷔해 어느덧 연기 경력이 30년 가까이 되며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여 온 오정세인데, 그가 만든 민주영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모습의 악인이었다. 선량한 얼굴의 빌런으로 극 초반부터 존재감을 드러낸 민주영은 무미건조한 말투와 감정 없는 표정으로 점점 더 극악무도한 악행을 일삼아 섬뜩함을 안겼다.

"저한테도 새로운 숙제였어요.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빌런은, 누가 빌런인지 헷갈리게 하다가 중간에 반전도 있고 그런 구조인데, '굿보이'는 처음부터 대놓고 민주영이 나쁜 놈이라 말하죠.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양파껍질 까듯이 까도 까도 새로운 악인의 모습이 계속 쌓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민주영을 그렸어요."

악인 민주영은 좀비처럼 계속 살아났다. 빼도 박도 못하는 범죄의 증거가 발견돼도 돈과 권력을 써서 빠져나갔고, 굿보이 윤동주에게 주먹으로 응징을 당하면 더 큰 폭력으로 대갚음했다. 평범한 공무원의 얼굴에서 점차 괴물의 얼굴이 되어가는 민주영의 변화는 철저히 오정세의 악인 설계가 바탕이 됐다.

"민주영을 어떻게 설계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이게 너무 세면 드라마를 쫓아가는 시청자들도 불편함을 느낄 수 있으니, 악행의 세기와 폭력의 정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감독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잡아갔어요. 외형적인 디자인도 신경 썼는데, 민주영이 맞아서 얼굴도 찢어지고 눈도 빨개지고,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며 마지막 16부에서는 괴물의 얼굴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평범했던 얼굴이 굿보이 팀에 의해 망가지는 게, 그들이 민주영의 가면을 벗겨준다는 의미도 담았죠. 헤어도 크게 티는 안 나지만, 민주영이 초반 관세청 직원일 땐 머리에 거의 손을 안 댔고, 정체가 드러난 이후엔 스타일링한 헤어로 작은 변화를 줬어요. 의상도 평범한 듯 보이지만 바지가 300만 원짜리라든지, 그렇게 고가의 옷을 입는 민주영을 표현했고요. 작은 변화에서 큰 차이가 보였으면 했어요."

오정세는 괴물처럼 망가져가는 민주영의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상처 디자인 하나하나에도 신경 썼다. 얼굴에 어떤 상처가 올라와야 더 섬뜩하게 보일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담을 수는 없을지, 섬세하게 고민했다.

"제가 어떤 영화 스틸컷을 봤는데, 눈썹 위에 세로로 상처 메이크업을 한 친구가 있었어요. 특이하다 생각했는데, 그걸 민주영의 상처로 가져오면 좋겠다 싶어 그런 식으로 상처를 디자인했어요. 그렇게 반영이 된 아이디어도 있고, 어떤 것들은 생각만 하고 반영이 안 된 것도 있죠. 후반부에 민주영이 얼굴에 대고 있던 핸드폰이 터지며 크게 화상을 입는데, 화상 흔적을 올림픽기나 메달 모양 같은 걸로 해서 굿보이의 흔적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그건 구현을 못 했죠."

드라마 속 악역은 때때로 시청자의 호응을 얻기도 한다.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서사가 깔리거나, 악행을 저지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 플레이가 더해지면, 밉지 않은 악역으로 시청자의 호감을 살 때가 있다. 오정세는 이를 경계했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라 애정이 생길 법도 한데, 그는 철저하게 민주영이 동정표를 받는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도록, 스스로도 캐릭터와 거리를 뒀다.

"민주영은 저 개인적으로도 찝찝했어요. 인물에 대한 정이 없었고,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민주영이란 캐릭터에 접근하며, 서사에 집중하지 않으려 했어요. 평범하고 선량했던 사람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그 서사가 중요하게 생각됐다면 그것에 포인트를 줬을 텐데, 민주영의 서사는 저한테 불편했어요. '굿보이'에서 민주영은 돈과 권력 때문에 괴물이 된 인물로만 존재해야지, 변명의 동정표를 받는 건 싫었어요. 그래서 이 인물을 연기하면서 희열이나 쾌감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고, 불편하지만 제가 그려야 할 인물로만 여겼죠. 굿보이 팀을 유지하는 자극제, 또는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괴물들. 그런 드라마적인 상징성으로만 그리고자 했어요."

'굿보이' 13회에서 경찰 지한나(김소현 분)는 민주영 앞에서 죄명을 줄줄이 읊는다. 이런 지한나의 추궁에 민주영은 싸늘한 얼굴로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오정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가 생각하는 '괴물'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TV를 보면, 누가 봐도 범죄를 저지른 나쁜 어른인데 권력과 돈으로 빠져나가서는 '전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던 기억이 났어요. 그런 게 민주영한테 보였으면 해서, 감독님과 얘기해서 그 대사 한마디를 넣었어요. 그렇게 돈과 권력에 숨어 있는 괴물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편이라 여기고 따랐던 사람이, 알고 보니 괴물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늘 안테나를 예민하게 세워놓고 있어야 해요. 그런 정서를 밑바탕에 깔고 민주영에 다가갔어요. 어떻게 보면 현실 같다고 느꼈어요. 나쁜 사람을 잡는 일이 현실에서도 쉬운 게 아니잖아요. 드라마에선 민주영을 처단하기가 너무 힘든데, 그게 전 현실과 맞닿은 느낌이었어요. '나쁜 사람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걸 보여주고, 그래도 결국에는 응징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싶었어요."
오정세

박보검, 김소현, 이상이, 허성태, 태원석이 악을 소탕하기 위한 굿보이 특수팀으로 함께 활약한 반면, 오정세는 빌런으로서 홀로 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래도 오정세는 웃음 넘쳤던 촬영장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후배 박보검의 태도에 감명받은 순간들을 떠올렸다.

"현장이 액션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진하게 감정 연기할 장면들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슛 들어가기 전엔 모두가 웃고 있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이 넘치는 현장이었죠. 보검 씨와의 촬영들도 즐거웠던 잔상이 진하게 남았어요. 꽤 오랜 기간, 많은 액션과 감정적으로 소모가 큰 작품이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항상 즐겁게 촬영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하고자 하는 배우인데, 그 친구도 그렇게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 거 같아서 보기 좋았어요. '나도 저 친구처럼 해야겠다' 하는 자극도 받았고요."

오정세는 알아주는 다작 배우다. 올해 상반기에만 영화 '하이파이브',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 '폭싹 속았수다', '굿보이'까지, 총 네 작품을 선보였다. 하반기에도 디즈니 플러스 '북극성'의 공개가 예고된 상황이고, 현재 출연을 검토 중인 작품도 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이유는 뭘까.

"작업을 하는 게 즐거워요. 그래서 예전부터 기회가 되면 계속 작업을 해 왔어요. 물론 너무 작품을 많이 해서 오는 단점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안테나를 세우고 있긴 하지만, 좋은 작품의 제안이 왔을 때 작품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절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앞으로도 저한테 좋은 작품, 캐릭터가 손을 내민다면, 얼마든지 잡을 거예요."

신기한 건, 그렇게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는데 크게 실패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작품을 고르는 탁월한 눈으로 좋은 작품을 선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캐릭터를 맡든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는 오정세의 배우로서 능력이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믿고 보는 배우',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는 오정세는 자신을 향한 대중의 높은 기대치에 이렇게 답했다.

"전 다음 작품도, 다다음 작품도, 계속 노력할 뿐이에요. 그러다 언젠가 시청자들이 저한테 실망하는 때가 올 수 있겠죠. 분명히 오긴 올 텐데, 그게 두려워서 스트레스받고 싶지는 않아요. 막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으며 그걸 이기려고 뭘 더 하려 하지 않고, 그때가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요. 다만 그때가 '늦게 왔으면 좋겠다', '안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매 작품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때가 늦게 오도록, 저 또한 노력해야죠."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해 고민한 만큼 최고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오정세인데, 연기는 여전히 어렵다고 한다.

"연기는 할 때마다 어려워요. 코미디는 코미디대로 어렵고, 빌런은 빌런대로 어려워요. 매번 새로운 숙제들이 저한테 주어지는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한 숙제를 마무리했다고 해서, 이게 제 안에 쌓이는 느낌도 아니에요. '내가 이번에 이런 감정을 잘했으니까, 다음에 다른 작품에서도 잘해야지'가 안 돼요. 오히려 '어라? 그땐 잘 됐는데, 왜 이번엔 안 되지?'가 돼요. 계속 다른 숙제만 쌓이는 거예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아마 모든 배우들이 그런 여정을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오정세는 카메라 앞에서 늘 긴장된다고 한다. 관객과 즉석에서 소통하는 연극 무대 위는 더 공포스럽다. 그는 20년 전 연극 무대에서, 눈에서 렌즈가 빠져 얼굴에 붙었는데 손으로 자연스럽게 떼어내지 못해 5분 동안 얼굴에 렌즈를 붙인 상태로 연기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연기뿐만 아니라, 남들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성격이다. 일례로, 지인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본 적이 있는데, 쓰인 대본대로 읽기만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해 망친 에피소드도 있다.

이렇게 긴장하는 사람인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연기를 하는데도 그의 연기가 훌륭한 건, 그만큼 치열한 고민과 철저한 준비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만반의 준비를 해서 현장에 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준비한 걸 과감히 다 버려야 할 때가 오더라도 유연한 연기력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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