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문민통제의 역사에서 진보 성향의 정부는 군에 대해 관여적 또는 간섭적 문민통제를 했습니다. 군의 일거수일투족에 사사건건 개입한 것입니다. 보수 성향의 정부는 자율적 문민통제를 했습니다. 군이 마음대로 하도록 풀어놨습니다. 진보와 보수 성향 정부가 정치적 색깔에 따라 극단적인 문민통제를 한 것입니다.
"합참의장에게 권한을 많이 주겠다"는 안규백 후보자의 발언은 달리 표현하면 군의 자율성 확대입니다. 보수 정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번 진보 정부는 군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진보 정부이지만 군에 대한 간섭은 줄어들고, 그만큼 군의 자율이 커진다면 진보와 보수 사이 중간쯤에 있는 균형적 문민통제라고 부를 만합니다. 군을 어느 정도 통제는 하되, 자율성도 보장함으로써 안보에 기여하는 이상적 문민통제에 가깝습니다.
한국 문민통제의 극단성
또, 사흘이 지난 10월 10일 북한 당 창건 기념일에 맞춰 경기도 파주 오두산 등에서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전단을 날렸습니다. "전단 살포 시 공격"을 예고했던 북한은 연천군 일대로 고사총 10여 발을 쐈습니다. 우리 육군은 기관총 40여 발로 대응사격했습니다.
10월 13일 열린 국회 국방위의 국정감사에서 조보근 정보본부장은 "알아서 군의 매뉴얼대로 하라고 그래서, 의장께 '그대로 하면 된다'고 전달했다"고 조준격파사격의 결심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최윤희 합참의장도 "군의 계획, 군의 매뉴얼에 따라서 대응했다"고 거들었습니다. 야당 국방위원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NSC나 청와대 지침 없이 군이 자율적으로 작전한 데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2014년 10월 일련의 사건은 박근혜 보수 정부에서 군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행동했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다른 보수 정부 시기의 군도 선조치 후보고, 자위권 등 자율을 향유했습니다. 진보 정부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4년 10월 보수 정부의 군이 행한 자율적 작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선제사격 금지, 우방충돌 방지 등의 조치로 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 익숙한 노무현 정부 비서실장의 시각에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합참 권한 강화하며 군 전문성도 높여야

안규백 후보자는 장성 출신이 아니라서 군의 속내는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방장관이 그동안 장악했던 권한 중 일부를 합참의장에게 넘기는 것은 합당한 수순으로 보입니다. 보수 정부였다면 이미 자율이 넘치는 군에 또 자율을 더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되겠지만 현재는 이재명 진보 정부이기 때문에 자율성이 제한된 군에 자율성을 수혈하는 차원으로 군사(軍事)가 이뤄질 공산이 큽니다. 진보 정부임에도 군에 자율을 보장하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균형적 문민통제가 펼쳐질 공산이 큽니다.
성공을 위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진보 정부에서 군이 자율을 누리는 만큼 군은 본연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합니다. 보다 정밀한 군사적 조언을 보다 적극적으로 정부에 개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참의장을 NSC 상임위원급에 앉혀 안보 이슈에 군의 목소리를 키울 필요도 있습니다. 정부가 안보·군사 정책을 결정하는 데 군의 역할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군은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최소한 장성들은 교육, 훈련, 작전에 정통한 것은 기본이고, 국제 정세도 꿰뚫어야 합니다. 진보 정부에서 자율을 확보하기 위해 군인들은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권리에 의무가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김영삼 정부 이래 개시된 한국 문민통제는 안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지향했습니다. 학술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진보와 보수 정부 모두 문민통제에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극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문민 국방 체제는 군의 권한을 키움으로써 진보 정부임에도 군의 자율을 보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보수 정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군의 자율성이 진보 정부에서 나타나는, 문민통제의 균형적 양상이 기대됩니다. 민군이 합심해서 한국 문민통제의 새로운 균형 모델을 창조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