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현판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에게 정상적인 업무를 하는 것처럼 속아 현금수거책으로 활동하게 된 경우라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습니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최근 사기·사문서 위조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살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지법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A 씨는 2022년 3월 중순 구직사이트를 통해 이력서를 등록했는데, 얼마 뒤 자신을 B급여대행 소속 팀장이라 소개하는 범죄 조직원으로부터 고객을 만나 퇴직금 등 서류를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일을 제안 받았습니다.
조직원은 A 씨에게 월급을 10원 단위까지 제시하며 근로계약서를 쓰게 했고, 신분증 사본과 비상연락망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정상적인 입사 절차를 밟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A 씨는 일을 시작한 뒤 첫 3~4일 간은 퇴직금 정산 명세서를 고객의 집으로 배달해 주는 일을 했으나, 얼마 뒤 텔레그램을 통해 지시를 받고 현금수거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A 씨는 지시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인물들의 부탁으로 왔다는 식의 말만 하면서 피해자들로부터 현금을 받았습니다.
채용된 업체와 무관한 금융감독원장 명의의 공문을 텔레그램으로 받아 출력해 피해자들에게 교부하기도 했습니다.
또 현금을 약 100만원 씩 쪼개 피고인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인적사항을 이용해 제3자에게 무통장으로 입금하기도 했습니다.
A 씨는 이런 방식으로 2022년 4월 5~12일 피해자 8명으로부터 9차례에 걸쳐 총 1억6,900만 원을 편취해 타인의 명의를 사용해 돈을 송금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A 씨는 팀장을 가장한 조직원에게 현금수거 업무가 불법이 아닌지 물었으나 '고객들의 요청'이라며 달래자 일단 믿고 일을 진행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러다 범행 마지막 날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을 다룬 영상을 보고 자수했습니다.
1심은 '현금수거책'은 보이스피싱 범행이 완성되는 데 필수적인 역할로서 비교적 단순 가담자라고 하더라도 그 죄책이 가볍지 않다는 취지로 A 씨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2심은 사기죄 등에 대해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무죄로 뒤집었습니다.
대법원은 A 씨가 현금수거 업무가 불법임을 강하게 의심할 수 있는 여러 정황 증거가 있었음에도 별다른 거리낌 없이 업무를 해 왔다며 처벌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반드시 보이스피싱 범행의 실체와 전모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만 각각의 범죄의 공동정범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피고인은 현금수거업무를 통해 보이스피싱 등 범행에 가담하는 것임을 알았거나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A 씨가 면접 없이 뽑혔고, 채용된 업체의 조직과 업무, 실체 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점, 타인의 주민등록번호 등 명의를 사용해 현금을 송금한 점, 사건 당시 40대로 이미 약 10년 간 사회생활을 해 왔던 점 등도 판단 근거가 됐습니다.
(사진=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